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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샤우뷔네 거장들의 작품: <엘렉트라>와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전시

by tardi 2025. 7. 1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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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가을, 말로만 듣던 베를린 샤우뷔네의 연출가와 배우분들을 직접 뵐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 한 작품은 국립극장에서 기획한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에서 그리스 국립극단 단원들을 이끌고 내한한, 베를린 샤우뷔네의 살아있는 전설이신 페터 슈타인(Peter Stein)의 <엘렉트라>였습니다. 다른 한 작품은 국제서울공연예술제에 벨기에 출신의 중견 연출가이신 루크 퍼시벌(Luk Perceval)이 베를린 샤우뷔네를 직접 이끌고 참여한 현대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두 작품은 고전극과 현대극이라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샤우뷔네의 저력을 극명하게 느끼게 해 준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페터 슈타인의 <엘렉트라>: 문학적인 연출

일반적으로 극 텍스트로부터 시작되는 연출가의 작업은 문학적이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연출가가 고전을 과감하게 자르고 편집하여 자신의 연극적 이념에 맞춰 완전히 새롭게 변모시키는 경우라도, 연출가가 문학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언어의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할 때 연극의 문학성은 더욱 부각됩니다. 배우의 대사가 그러하며, 무언극의 경우라도 언론이나 평론가들의 연극 관련 행위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문학과의 불가피한 연관성을 의식한 까닭에,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연출가들 중에는 문학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관점에 따라 현대 연출이 지니는 하나의 성향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 연출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슈타인의 경우, 철저한 작품 분석을 통해 원작을 가능한 한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작업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엘렉트라> 역시 그러한 그의 연극적 작업관을 아낌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흔히 평론가의 임무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나 공연의 진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평론가들이 줏대를 상실한 채 거장의 작품에 대해 일방적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대중이나 전문가들에게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연출가의 작품이 공연되면 누구나 관심을 갖게 마련이고, 웬만해서는 명망 있는 연출가의 연극을 비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공연 역시 거장다운 면모를 과시했다는 식으로 칭찬하는 것이, 평론가의 판단 미스나 실수에 대한 위험 부담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슈타인 감독의 경우는, 그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무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의 참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무게감 있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냈기에 마음껏 칭찬을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연을 보면서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그의 연출력이었습니다. 연출력이란 넓게는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장치, 조명, 음향을 모두 포괄하지만, 이러한 무대 언어 하나하나를 분리시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무대를 관조하면서 과연 연출가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대에서 제대로 표출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부터 그가 이번에 보여준 문학적 무대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원작에 대한 존중이 철저합니다.

고전에 메스를 가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텍스트 분석에 철저하고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렉트라>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복수는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크게 특이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무대에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엘렉트라라는 개인의 고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수의 칼날이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복수의 신념은 그만큼 갈등을 야기합니다.

어찌 되었든 <엘렉트라>는 엘렉트라를 중심으로 그녀와 타인들과의 갈등, 특히 동생과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의 갈등이 그려져 있는데, 주로 독백을 통해 혹은 코러스에게 전하는 말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조명과 의상, 합창 같은 무대 언어는 섬세하게 짜인 고급의 옷감처럼 유연하지만 철저합니다. 그것들은 엘렉트라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코러스의 섬세한 동작은 소리와 더불어 개인의 내적인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고 부피화시켜 삼차원의 세계로 이끌고 있습니다. 불균형과 균형의 집단적 움직임으로 폭과 깊이를 무한히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원작에 손대지 않으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연출가의 야심은 상당한 독서량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임에 틀림없을 텐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슈타인 감독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무대에는 상징이 풍요롭고 일목요연합니다.

상징의 일목요연함은 바로 텍스트의 철저한 분석에서 오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상징의 풍부함은 문학적 무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징으로 검은색 옷과 흰색 옷의 대조가 있습니다. 코러스의 흰색 의상에 둘러싸인 검은 의상의 엘렉트라는 시종일관 빗자루 질을 해댑니다. 그녀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살인자인 어머니와 정부인 아이기스토스가 권력을 손아귀에 쥔 채 아버지의 침실에서 희희낙락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감에 가슴을 쥐어짭니다. 자기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직 외지에 나가 있는 동생 오레스테스만이 돌아와 아버지를 복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의 검은 옷은 심장이 터질 듯한 그녀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검은색은 검게 타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자 온통 세상에 만연해 있는 더러움과 추악함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검은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엘렉트라는 강박증 환자처럼 하염없이 빗자루를 움켜쥡니다. 떨쳐 버리고 싶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비극적 행동이 빗자루 질이라는 상징적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엘렉트라는 넝마 같은 검은 옷을 던져 버리고 순백의 흰 옷으로 바꿔 입습니다. 검은 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다음 자신을 몸을 구석구석 씻어 내리는 행위 또한 빗자루 질과 같은 의미입니다. 검은 것을 완벽하게 씻어내려는 동작은 고통을, 혹은 악을 털어내려는 동작인 것입니다.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흰색으로 변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레스테스에 의해 공정한 복수가 이루어져 순수한 세상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무대 장치만 해도 상징성이 풍부합니다. 무대 안쪽 정중앙에 제단처럼 쌓아진 검은 문과 그를 둘러싼 알루미늄 질감의 차가운 벽은 그 벽 너머에서 자행될 복수의 장면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암시합니다. 무대에서 그 암시는 물과 불이라는 생명의 기원, 물질의 기원을 표출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부분과 보이는 부분의 균형을 이룹니다. 현대 무대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살인 행위가 결코 무대에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고전 비극의 이론을 존중하는 연출가의 태도, 오직 피 묻은 칼로 복수가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행위 역시 연출가의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장면마다 그 감각적 아름다움을 위한 연출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소문만 들었지 직접 접하기는 처음인 이번 공연에서, 슈타인 감독은 무대 미학을 추구하는 연출가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균형미에서 드러나거나, 또는 청각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의 적절한 조화에서 발산되었습니다. 합창과 동작에 있어 코러스의 적절한 활용, 그녀들의 자유로운 소리와 의상, 동선은 그러나 자유로움 속에 엄격성과 규칙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코러스의 소리와 군무는 짜임새가 없는 듯하지만 분명하게 구조화되어 있고, 통일성이 없는 듯하지만 치밀한 연출 속에서 분명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무대를 활보하는 코러스의 비대칭적 동작은 슈타인 감독의 연출의 진면목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의 어긋남이 불쾌한 불균형을 초래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을 배가시킵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짐으로써 전체 꽃잎이 돋보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시종일관 비슷한 장면은 많으나 똑같은 장면은 없어 보이는 그녀들의 합창과 동작은 이 연극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격적이거나 크게 두드러진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이념과 원작의 모든 것을 보여주신 연출가의 인내력이 돋보인 <엘렉트라>였습니다.


2. 루크 퍼시벌의 <세일즈맨의 죽음>: 깊은 연구의 결과가 자아낸 기막힌 상상력

작품은 연출가를 잘 만나야 그 가치가 드러납니다. 이뿐만 아니라 연기자와 배역, 연출과 배우 등 이른바 '궁합'이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번 경우는 작품과 연출가의 궁합이 기막힌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번을 보았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며 과연 이 작품이 그토록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이번 공연을 통해 이 작품이 과연 명작임에 틀림없음을 가슴 깊이 확인하였습니다. 그만큼 샤우뷔네의 공연은 새로웠으며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흔히 잘 알려진 작품을 접하게 되면 속으로 "과연 너희들은 어떻게 만드는가 한번 볼까"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현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세일즈맨의 죽음>의 내용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기에, 이번 공연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베를린 샤우뷔네와 그 배우들 자체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무대에서 특별한 깜짝 쇼도 없었고 놀랄 만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공연 내내 관객을 깊이 있게 몰입시켰습니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적절한 리듬감을 살린 탓인지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환상적인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고 기발한 속임수를 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해석의 힘'이었습니다. 앞서 슈타인 감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석의 힘'은 샤우뷔네의 두 거장이 보여주신 강한 능력이었습니다. 꾸준히 깊이 있게 연구된 연극, 연구와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해석된 연극이 진정 가치 있는 연극임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이토록 강력하게 다가온 것은 진정 연출의 힘, 해석의 힘, 연구와 상상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갑작스러운 권위가 추락되고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는 우리 아버지들의 뒷모습이 클로즈업되어 강조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갖는 현대성이자 시사성이기도 합니다. 연극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연출가는 왜 성(性)을 과장해서 드러냈을까요? 벌거벗은 몸, 강조된 여자의 가슴, 아슬아슬한 성행위 장면, 동성애 등이 확장되어 무대에서 제약 없이 펼쳐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저 눈요기라고 하기에는 작품이 깊이가 있고 논리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요? 그렇습니다, 성은 욕망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욕망, 사회적 신분에 대한 욕망, 경제적 욕망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욕망이 성이라는 문으로 표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욕망은 살찐 자들의 잉여와 결핍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깃간의 돼지고기처럼 풍성한 듯 보이는 배우들의 잉여적 살덩이는 사회에 의해 욕망이 꺾이거나, 혹은 사회에 의해 도살된 자들을 상징합니다. 잉여적 결핍은 무대 안쪽의 숲과 빈약한 나머지 무대의 대립으로도 표현됩니다. 무성한 숲은 살덩이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숲입니다. 헐벗은 중앙 무대와는 달리 배경을 이루는 숲은 무진장 풍요롭습니다. 그 극한 대립은 젊은 시절 세일즈맨으로서 아버지가 품었던 욕망과 현재의 메마른 운명, 모든 것을 잃고 고독과 분노만이 치미는 이중적 운명, 실패한 욕망의 극단 대립을 상징적으로 제시합니다. 충만과 공(空) 사이에서 극한 대립이 생겨납니다.

무대 안쪽 반 이상을 화분들로 채워 숲을 만들고, 나머지 부분은 3인용 소파와 1인용 소파, 그리고 TV 수상기가 전부인 무대는 단순한 것 같지만 갖가지 코드가 숨어 있습니다. 그 코드는 대략 이중적이며, 이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옷을 입음과 벗음: 등장인물들은 처음에는 옷을 벗은 형태입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상황에 맞게 점점 옷을 챙겨 입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가용과 마찬가지로 옷은 사회적 신분이자 욕망의 특징을 지닙니다. 또 하나, 남자가 옷을 입을수록 여자는 벗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면 그만큼 권력이 생겨나고 여자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지배당하는 여자, 욕망의 대상인 여자로서 옷을 벗는 것입니다. 옷은 사회적 욕망이고 벗음은 인간적 욕망일까요?
  • 소파의 상징성: 소파는 권위의 상징이자 밥줄의 상징이자 아버지의 삶과 죽음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이 소파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풍요의 숲에서 메마른 무대로 나오는 것은 아버지의 종말에 대한 비극을 보여줍니다.

이번 공연들을 접하면서 우리 연극을 되돌아봅니다. 국내 극단 중에는 수많은 연구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극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그들의 고민과 연구 열정은 서양 어느 극단에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국립극단이나 샤우뷔네가 보여준 수준의 연극을 순수 국내 극단에서 제작한다는 것을 기대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서양인들의 연극에 대한 전통은 수천 년에 걸쳐 적어도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1세기 남짓한 우리의 신연극의 역사를 감안할 때 서양 연극의 전통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연극계에서 제3세계권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아시아 국가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권의 연극도 이런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2007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만난 인도의 <아라비안 나이트>나 우즈베키스탄, 인도, 이란이 공동 제작한 <비극의 여인들> 역시 전반적으로 수준이 미미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패배의식에 젖어 있어야만 하는가!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따라서 다음의 질문을 토대로 연극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연극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한 가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것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로의 회귀나 보수주의적 개념으로 가자는 것이 결코 아니라, 진보적 차원에서, 미래 지향적 차원에서 과거의 전통 연극을 철저히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연극, 우리의 옷을 입힌 연극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극의 양식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식 사고, 언어, 풍습, 심지어 옷과 먹을거리 등 한국적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연극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한국의 극작가에 의해 창작된 연극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서양 연극과 우리의 전통 연극을 적당히 얼버무려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작품인가가 아니고, 작품을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으로 소화시키느냐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극단 목화, 미추, 우투리, 연희단 등의 연극은 어느 정도 자신의 색을 지니면서 한국적인 문화와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번역극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아울러 이들의 연극에는 한국인의 표정과 몸짓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양 연극에 대한 꾸준한 접촉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열린 개념에서 우리의 과거 연극 양식을 연구하고, 다각적 차원에서 우리의 것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 만난 샤우뷔네 거장들의 연극은 새로운 연극에 눈뜨도록 하면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충격적인 연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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