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관 25주년을 맞이한 서울 LG아트센터의 LG SIGNATURE 홀에서는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연출 전인철, 2025.05.07~2025.06.08)가 성황리에 공연되었습니다. 이번 공연은 로렌스 올리비에상 베스트 감독상을 수상한 리처드 이어(Richard Eyre)의 각색 버전을 활용하여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이어의 각색은 동시대 관객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인물, 언어, 리듬을 재해석하고 연출에서도 여러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헤다 가블러>는 2005년 런던 올드빅 극장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공연되었으며, 연극성과 심리 묘사에서 탁월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헤다라는 인물과 무대 장치의 각색이 돋보였습니다. 헤다는 전통적인 피해자나 악녀의 프레임을 넘어, 자율성과 통제된 억압 사이에서 분열된 내면을 지닌 복합적인 인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덕분에 그녀가 지닌 무기력과 냉소, 그리고 심리적 욕망이 현대 관객에게 더욱 분명하게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이어가 각색한 무대는 리얼리즘을 탈피하여 심리적 긴장과 배우 중심의 연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번 LG아트센터 공연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무대 장치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감정선의 흐름은 시각적이기보다 인물 간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특징을 보입니다. 요약하자면, 이어의 각색은 현대적인 언어와 심리적 정밀성, 그리고 억압된 자의 침묵과 폭발을 예리하게 살리는 방식으로, 원작을 존중하면서도 동시대 관객에게 강한 공감과 몰입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필자는 5월 10일 토요일 오후 4시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객석은 만석에 가까웠습니다. 그동안 LG아트센터는 스타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명 배우의 인지도와 매력을 통해 공연의 흥행을 이끌어왔습니다. 2023년 <나무 위의 군대>의 손석구, 같은 해 <파우스트>의 박해수, 2024년 <벚꽃동산>의 전도연, 그리고 이번 <헤다 가블러>에 출연한 이영애 배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스타 시스템은 배우의 이름값과 팬층이 작품 자체의 예술성보다 흥행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LG아트센터는 여기에 예술성이 담보된 고전 작품을 선택하여 스타성과 작품성을 결합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선보였습니다. 스타 시스템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흥행 장치이지만, 때로는 예술적 가치와 균형을 맞추기 어려운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LG아트센터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현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은 연극사에서 고전주의에서 근대 리얼리즘으로의 전환을 이끈 핵심 인물입니다. 그는 극작가로서 당대 사회의 위선과 개인의 내면 갈등을 날카롭게 파헤친 사회 비판적 사상가이자 심리극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입센 연극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리얼리즘입니다. 리얼리즘 연극의 주인공은 영웅이나 왕이 아닌, 공무원, 의사, 가정주부, 부르주아 등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고전주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영웅들의 거대한 사건보다는 일상을 무대화하여 가족 내의 갈등, 숨겨진 과거, 도덕적 딜레마 등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합니다. 나아가 일상적인 대화와 자연스러운 인물 설정을 통해 극을 구성하고, 사회 제도, 도덕, 가족 등 현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전주의 연극과 달리 리얼리즘 연극에서 무대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보다, 현실을 더욱 자세히 확대하는 돋보기로 기능합니다. 인물은 선하거나 악한 존재이기 전에, 복잡하고 모순적인 내면을 지닌 인간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주인공 헤다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일상적인 대화처럼 보이지만, 말과 말 사이에 숨겨진 감정과 의도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입센의 주인공들은 종종 사회 규범과 충돌하며, 진실과 자유를 찾아 나서는 존재로서 여성의 권리, 계급 문제, 종교적 위선 등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주제들을 과감히 다룹니다. 이처럼 일상을 다루는 리얼리즘 무대는 화려한 상징적 무대가 아닌, 현실처럼 꾸며진 무대가 특징입니다. 연기 또한 감정을 과도하게 토로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말투와 동작으로 무대 위에서 마치 일상을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입센의 대표작으로는 여성 해방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인형의 집>(1879)이 있습니다. 주인공 노라가 남편과 사회의 기대를 거부하고 자아를 찾아 떠나는 주제는 당시 사회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881년 발표된 <유령>은 위선적인 도덕과 가족 내의 금기(근친상간, 성병 등)를 충격적으로 고발하여, 발표 당시에는 공연이 금지될 정도였습니다. 다수의 폭정을 비판한 <민중의 적>(1882)은 진실을 말한 의사가 오히려 사회의 적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야생 오리>(1884)는 진실의 폭력성과 자기기만의 환상 구도를 통해 '진실이 과연 언제나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야생 오리>는 작가가 리얼리즘에서 상징주의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1890년에 발표된 <헤다 가블러>(Hedda Gabler)는 권태와 지루함에 사로잡힌 귀족 여성 헤다의 파괴적인 욕망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이처럼 문제극의 창시자로 알려진 입센은 인물의 도덕적, 정서적 갈등과 결정을 중시하면서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문제 해결은 관객에게 맡기는 태도를 보입니다.
<헤다 가블러>의 비극적 서사
여성의 복잡한 내면 심리를 다루는 <헤다 가블러>의 주인공 헤다는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복잡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입센의 후기 작품인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욕망과 억압을 세밀하게 탐구한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여성의 억압된 욕망, 권력과 자유, 사회적 위선, 자아의 붕괴 등을 핵심 주제로 다룹니다.
총 4막으로 구성된 <헤다 가블러>의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헤다와 남편 조지 테스만 부부의 새집에서 펼쳐집니다. 이는 고전극의 '장소의 일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대목입니다.
제1막 : 막이 오르면 신혼부부 헤다와 조지는 한 달여의 긴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호화로운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다는 이미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불만에 휩싸여 있습니다. 헤다의 학교 후배인 테아가 방문하여 에일레르트 뢰브보르그의 소식을 전합니다. 테스만은 교수직을 노리고 있지만, 친구이자 경쟁자인 에일레르트가 이미 한 권의 책을 출판했고 또 엄청난 새로운 원고를 완성했다는 소식에 긴장합니다. 헤다는 옛 연인 에일레르트의 등장에 질투와 불안정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제2막 : 하루가 지난 시점, 헤다는 벌써부터 지루해하며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권력 놀이를 시작합니다. 테아가 에일레르트를 도와 원고를 함께 썼다고 말하자 헤다는 내심 분노합니다. 에일레르트가 헤다를 다시 마주하기 위해 방문하자 옛 감정이 잠시 되살아납니다. 브라크 판사는 헤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그녀를 유혹하며 지배하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헤다는 알코올 중독을 극복했던 에일레르트에게 술을 마시도록 유혹하고, 그가 과거의 폐인 같은 삶으로 다시 빠져들도록 유도하며 테아와의 관계를 뒤흔드는 조짐을 보입니다.
제3막 : 다음 날 새벽. 조지와 브라크, 에일레르트는 파티에 가고 헤다와 테아는 잠들어 있습니다. 조지가 귀가하여 전날 밤 파티에서 있었던 엄청난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에일레르트가 자신의 책으로 출간된 원고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실로 엄청났다는 것, 그리고 실수로 그 원고를 잃어버렸지만 자신이 우연히 주웠다며 원고를 보여줍니다. 큰고모의 죽음 소식에 조지는 서둘러 떠나고, 원고는 헤다의 손에 넘어갑니다. 원고를 감춘 헤다는 테아의 고통을 즐깁니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돌아온 에일레르트에게 아름답고 자유로운 죽음을 언급하며 권총을 쥐여줍니다. 그 권총은 한때 연인이던 시절 헤다가 에일레르트에게 겨눈 적이 있던 총입니다. 절망한 에일레르트가 퇴장한 후, 헤다는 그토록 소중한 에일레르트와 테아의 원고, 그들의 '아이'를 난로에서 태워버립니다.
제4막 : 저녁. 헤다는 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브라크 판사가 등장하여 에일레르트가 자살을 시도했으나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헤다는 자신이 원했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절망합니다. 브라크 판사는 헤다가 에일레르트에게 권총을 건넨 사실을 눈치채고 이를 빌미로 협박합니다. 그의 손아귀에 놓여 노예처럼 굴종하게 될 미래를 예감한 헤다는 스스로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택합니다. 그녀는 누구도 자신을 지배할 수 없다는 마지막 선언처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이윽고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렇듯 헤다는 겉으로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이지만, 동시에 내면으로는 지루함, 억압, 권력에 대한 욕망, 자유에 대한 갈망이 뒤엉킨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인물 헤다와 이영애의 만남
<헤다 가블러>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핵심은 이영애 배우가 연기한 인물 헤다입니다. 헤다는 연극사에서 매우 중요한 여성 캐릭터로서, 그동안 수많은 여배우들이 탐냈던 역할입니다. 입센이 헤다라는 인물을 창조한 것은 당시 연극의 경계를 확장하고,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여성의 욕망, 사회적 억압을 예리하게 드러낸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이 사회의 거울로 기능한다고 본 입센은 인물의 내면 심리 탐구에 탁월한 작가입니다. 그가 창조해 낸 인물 가운데 헤다는 매우 복잡하고 모순된 인물입니다. 지루함과 권태에 몸부림치며, 타인에 대한 통제욕과 자기 파괴성을 지닌 인물로, 단순한 드라마의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인형의 집>의 노라에게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순종적인 아내, 희생적인 어머니 같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틀에 얽매여 있었지만, 헤다는 능동적이며 위험하고 주체적인 욕망을 갈망하는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스타 배우인 이영애의 섬세한 연기는 관객을 설레게 했을 것이며, 본인 역시 헤다 역에 상당한 연기적 욕심을 지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러한 성격의 헤다를 볼 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왜 그녀는 온순하고 성실하며 연구밖에 모르는 조지 테스만과 결혼했을까요? 헤다는 자신 본래의 성품이나 욕망을 억압하고, 장군의 딸로서 상류 사회의 아름답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사회적 기대에 길들여 성장했을 것입니다. 사회적 체면을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안정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젊은 시절 열정적인 관계를 맺었던 에일레르트와는 달리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조지는 남편감으로 무난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본래 헤다는 타인을 조종하고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인물입니다. 조지는 왠지 미숙한 인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러한 남편은 헤다로 하여금 자신의 우월성과 통제성을 느끼도록 했을 것입니다. 결혼 후 신혼여행을 다녀오지만, 조지는 그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극제가 되지도 못하므로 헤다의 욕망은 더욱 공허해집니다. 아마도 헤다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질식당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고 분노가 쌓였을 것입니다. 결혼은 그녀에게 어떠한 삶의 의미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제약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지와의 결혼은 결과적으로 헤다에게 자유를 빼앗긴 자기모순의 상징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헤다는 조지와의 결혼을 통해 사회적 안정과 체면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 선택은 결국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질식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모순된 결혼은 그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파국적인 끝을 맺게 되는 심리적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헤다의 성격, 나아가 그녀의 상황을 이해할 때 마지막에 스스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그녀는 삶을 통제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진 인물이지만, 현실에서는 남편에게 기대야 하는 삶,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운명, 에일레르트와의 파국, 브라크 판사의 위협과 통제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특히 에일레르트의 죽음을 미화하고 싶어 했으나, 빨간 머리 디아나의 침실에서 가슴 안주머니에 있던 권총이 발사되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마지막 환상마저 무너집니다. 이러한 좌절은 헤다에게 삶 전체의 무의미함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지루함과 무기력이 최절정에 달한 상태입니다. 남편과의 감정적인 거리도 멀고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공허와 염증으로 실존적 무의미에 이르게 됩니다. 브라크 판사의 협박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원고 행방의 진실을 눈치챈 판사는 에일레르트의 죽음을 그녀의 책임으로 돌리고 비밀을 폭로할 것을 위협하며 그녀를 통제하려 듭니다. 과연 헤다가 자기 결정권을 상실하고 그의 자유에 종속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본다면, 헤다의 자살은 자기 파괴 이전에 자기 해방을 위한 역설적인 행위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타인에 의해 조종되거나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살을 통해 자신의 마지막 통제권을 행사한 것이 됩니다. 바로 이 점이 입센이 보여주고자 한 현대 비극의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즉, 헤다의 자살은 주체적인 의지를 가진 여성이 사회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후의 자유 행위였던 것입니다.
무대공간 해석
입센 연극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 한 장소에서 24시간 이내에 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전극의 삼일치 법칙을 충실히 계승한다는 점입니다. 장소의 일치는 사건이 한 장소에서 일어나므로 막간에 무대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무대를 일상처럼 세심하게 꾸밀 수 있도록 합니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옮기는 리얼리즘 연극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이러한 무대를 보면서 무대가 마치 현실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LG아트센터 공연은 이러한 기존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이는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과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무대를 가리는 막이 열려 있어 관객은 입장하면서 곧바로 무대와 대면합니다. 대극장의 넓은 무대 가장자리에는 의자들이 늘어서 있고, 간간이 간단한 소품이 놓여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피아노와 형형색색의 호일 풍선 뭉치입니다. 피아노는 헤다뿐만 아니라 브라크 판사도 자유롭게 이용하며, 때로는 피아노 위에 오르거나 건반을 발로 밟아 파열음을 내는 등 인물의 동선을 위해 적절히 활용됩니다. 피아노는 원작에 있는 소품이지만, 공중에 떠 있는 풍선은 이따금 인물들이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소품들이 처음에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지만, 익숙해지면 무대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배우들의 움직임입니다. 배우는 자기 대사가 끝나면 퇴장하고 차례가 되면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 뒤로 퇴장하지 않고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자기 역할이 끝났지만, 관객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배우들은 여전히 어떤 역할이 진행 중인 것처럼 보입니다. 옷걸이도 그냥 무대 위에 드러나 있으며, 갈아입을 옷들도 걸려 있어 배우들은 역할에 필요한 의상을 즉석에서 갈아입습니다. 리얼리즘에 완전히 반하는 이러한 방식은 서사극 양식의 특징입니다. 서사극 양식에서 관객은 몰입이나 동화보다는 거리를 둔 상태에서 무대를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메라를 도입하여 섬세한 표정 연기를 이미지로 확대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덕분에 대공연장의 뒤편에 앉은 관객은 확대된 배우의 얼굴을 상세하게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대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이 대면하는 형식의 연극이지만, 관객은 실제 인물보다 거대한 화면에 투사된 이미지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전반의 1, 2막이 지나고 인터미션 이후 후반의 3, 4막이 공연됩니다. 전반 무대에는 커다란 그림 한 점이 놓여 있는데, 포도관을 쓴 디오니소스가 그려져 있습니다. 헤다의 대사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포도관을 쓴 디오니소스는 술에 취한 천재 에일레르트를 상징합니다. 이 디오니소스 그림은 후반에는 전신 거울로 대체됩니다. 후반에는 작은 유리 벽난로도 등장합니다. 무대의 프레임은 전체적으로 흰색 톤을 유지하고, 천장 가운데에 둥근 구멍(oculus, 오큘러스)이 뚫려 있어 마치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연상시킵니다. 무대의 오큘러스를 통한 조명이 무대 뒤편에 그림자를 만들어 상황에 따라 그림자극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헤다 가블러>의 무대에는 몇몇 흥미로운 오브제들이 등장합니다. 무대 맨 앞에 놓여있는 상자 속 두 자루의 권총이 그중 하나입니다. 장군 아버지가 물려준 권총은 남성적인 힘 또는 죽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헤다가 자기를 표현하는 핵심 오브제입니다. 평소 그녀는 권총에 집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자루는 에일레르트의 죽음, 다른 한 자루는 헤다 본인의 죽음에 관여합니다.
또 하나는 에일레르트의 원고입니다. 에일레르트와 테아의 '아이'로 지칭되는 원고는 헤다에 의해 벽난로에서 태워집니다. 이 원고는 단순히 책이라는 물리적인 것을 넘어, 에일레르트와 테아의 창조물로서 미래이자 생명을 상징합니다. 원고를 손에 넣은 헤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불에 태워버리는 행위는 생명의 파괴 행위로서 질투의 표현이자 자기 파괴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한편, 헤다는 테스만 부인으로 불리는 대신 헤다 가블러라는 처녀 시절의 이름을 선호합니다. 이 역시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정체성을 남편의 성인 테스만이 아닌 '가블러'에서 찾으려는 그녀의 심리를 보여줍니다. 제목 <헤다 가블러> 역시 이러한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헤다의 성격상 그녀의 정체성이 결코 결혼으로 가려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전인철 연출의 미학
섬세한 연출력과 밀도 높은 미장센으로 주목받아온 전인철 연출은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2006년 <고요>로 데뷔한 이후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특히 <목란언니>(2012), <노란봉투>(2014), <나는 살인자입니다>(2017) 등의 작품으로 여러 연극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소외감, 가족 또는 사회 속의 균열, 죽음과 상실, 의미의 부재 등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주로 연출해 왔습니다. 사회 비판적 시선으로 공간의 상징성, 감정의 절제와 분출의 리듬을 강조하는 그의 연출 스타일을 고려할 때, <헤다 가블러>의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무대 디자인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상, 조명, 음향을 적극 활용하는 연출가답게 카메라, 피아노, 권총 등 핵심 오브제를 사용하여 인물의 심리를 그려낼 뿐만 아니라, 조명과 음향을 통한 심리 묘사 또한 돋보입니다. 아울러 헤다의 내면 연기가 강조되어, 인물의 심리 상태가 정제된 연출 아래 밀도 있게 펼쳐졌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LG아트센터의 <헤다 가블러>는 리처드 이어의 현대적 각색을 바탕으로, 전인철 연출의 미니멀하고 상징적인 무대 연출을 통해 헤다라는 인물의 내면과 억압, 자유에 대한 환상, 그리고 극적인 붕괴를 예리하게 파고든 공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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