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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Waiting for Godot)

공연·전시

by tardi 2025. 7. 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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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와 작품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1906.4.13 ~ 1989.12.22)는 아일랜드 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이다. 트리티니 컬리지(Trinity College)에서 프랑스 문학과 이태리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1928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강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파리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의 파리는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조이스와도 만나는 등 성숙된 문학 세계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문학을 성취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보통 3기로 나뉜다. 1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며, 2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로 문학적으로 완숙한 시기다. 3기는 1960년부터 죽을 때까지에 해당한다.

베케트의 첫 작품은 에세이 Dante... Bruno. Vico.. Joyce(1929)였으며, 영어로 된 두 번째 에세이는 Proust(1931)이다. 첫 번째 소설은 Murphy(1947, 36차례 거절되다가 겨우 Bordas에서 출판)이며, Éditions de Minuit에서 소설 삼부작 <몰로이>(Molloy, 1951), <말론 죽다>(Malone Meurt, 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자>(L’Innommable, 1953)가 출간된 후 평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일종의 메타 소설인 <몰로이>에는 훗날 <고도>에서 만날 수 있는 부조리한 삶의 문제,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한계, 자아에 대한 탐구, 표현이 지닌 허무성, 작가의 죽음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평자들은 사르트르의 <구토> 이후의 최고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소설을 쓰던 그가 갑자기 극작품으로 선회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소설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쌓아가던 중에 일종의 기분전환용으로 <고도>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고도>20세기 연극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만큼 프랑스 연극계에 커다란 충격을 가한다. 1956BBC 방송국의 권유에 따라 라디오 드라마 <넘어지는 모든 것들>(All That Fall (Tous ceux qui tombent)를 쓰기도 한다. 이후 <승부의 끝>(Fin de partie, 1957),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 1958), <행복한 나날>(Oh les beaux jours, 1963) 등 종래의 연극 개념을 뒤엎는 독창적인 희곡을 발표하여 전후 부조리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가 된다. 그의 극작품은 신선한 문체와 뛰어난 연극적 감각으로 정평이 나 있다. 후기작으로 어두운 무대에 입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독백하는 특징이 있는 <내가 아니야>(Not I, 1973)가 있다. 베케트는 1969<고도>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의 극작품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어 작품

1952 : En attendant Godot

1957 : Fin de partie (단막극), Acte sans paroles I

1961 : Acte sans paroles II

1963 : Oh les beaux jours (2막극)

1966 : Bing

영어 작품

1958 : Krapp's Last Tape

1961 : Happy Days

1963 : Play, The Old Tune

1967 : Eh Joe

1973 : Not I

1976 : That Time, Footfalls

1982 : A Piece of Monologue

1981 : Ohio Impromptu, Rockaby

1983 : What Where

1984 : Quad

 

2. 희곡 읽기

2.1. 개괄

동일한 극작품일지라도 공연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 다양성은 고갈되지 않는 샘물처럼 무궁무진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니체의 말대로 진실은 없고 해석만 있기 때문일까? 극작품이 절대불변의 원본이라는 믿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 극작품은 하나의 참조 사항으로 전락했다. 관객들은 원작의 가치보다는 연출가의 해석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한편, 집단 관객과 직접 소통을 하는 연극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지닌 예술이다. 어제의 공연이 오늘의 공연과 다른 것은 관객이 다르기 때문이다. 관객의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고 그들의 해석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다. 개인에게 있어 주체적 해석이 가로막힐 때 그것은 단절이자 죽음이다. 따라서 주체적 해석이 적극적으로 옹호되는 연극이야말로 소통과 힐링마저도 가능한 예술이라고 하겠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근거(source, base)없는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 잉여나 오역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해석은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 점에서 극작품의 논리적 분석은 근거가 제공된 장면 만들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S. Beckett)2막 극이다. 베케트가 작품 원고의 표지에 적은 날짜에 따르면 이 극작품은 1948109일에서 1949129일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으로 출간된 것은 1952년이다. 베케트는 이 극작품을 프랑스어로 먼저 썼고, 1954년에 스스로 영어로 번역하였다. <고도>195313일 파리의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파리에서 초연이 된 후, 베케트의 영어 번역본으로 195583일 피터 홀(Peter Hall)의 연출로 런던에서 공연되었다. 또 같은 해 1028일 앨런 심슨(Alan Simpson)의 연출로 더블린에서 공연되었고, 195613일 알란 슈나이더(Alan Schneider)의 연출로 미국 마이애미에서 공연되었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며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고도>는 해체 철학자 데리다가 극찬한 작품이기도 하다. <고도>에는 말은 있지만 줄거리는 없다. 두 인물(걸인 혹은 노숙자)이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난다. 전개도 없을뿐더러 클라이맥스나 대단원도 없다. 다만 그들은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마저 의심스럽다. 포조와 럭키라는 이상한 두 사람이 지나가고 고도가 보냈다는 소년도 왔다 간다. 하지만 고도는 끝까지 무대에 나타나지 않는다. 지루한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이제는 그만 그곳을 떠나겠다고 하지만 정작 떠나지 못한 채 막이 내린다.

2.2. 장면 구성

<고도>의 장면 지시는 지극히 간략하다. 극작자의 간단한 무대 지시는 연출에 있어 공간 해석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장면 구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 즉 나무, 바위, 모자, 신발 같은 사물들과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간을 분리하고 통합하는 인간(등장인물)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극의 특징은 연출가의 권한이 크다는 것이다. 연출가의 권한이 커질수록 극작가의 입지는 줄어든다. 연출가와 극작가의 영역 싸움의 양상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극작가가 직접 연출을 하는 경우도 있고, 작품 속에 엄청난 무대지시로 무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무대지시란 극작가가 무대, 인물설정, 연기 등을 지시하는 것으로 연출가의 입장에서는 당위적 명령으로 보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 셰익스피어 연극, 몰리에르 연극에는 무대지시가 거의 없다. 그러나 부조리극은 무대지시가 많으며 베케트의 작품에도 무대지시가 많기로 유명하다. <고도> 역시 전체 어휘의 거의 절반이 무대지시로 채워져 있다. 사실 베케트는 <고도>의 연출에 불만을 품고 독일 공연에서는 직접 연출을 한 바 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고도>에서 공간에 대한 지시는 예외적으로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Route à la campagne, avec arbre”(시골길, 나무 한 그루)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극작품 읽기로부터 시작하는 장면 만들기는 무대지시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무대지시 이외에 대사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장면을 유추해 내는 작업이야말로 공연 예술가 전체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된다. 사실 두 시간 미만의 공연에서 관객에게 드러나는 극적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상상적 해석을 통해 인물과 공간을 확장시켜 그들의 일생을 만난 것과 같은 착각을 한다. 그 이유는 관객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매 장면으로부터 그들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도 유추하는 습관적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베케트의 극작품 역시 비록 무대지시가 간략하다고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통해 무대공간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므로 연출가가 장면을 임의로 구성할 수만은 없다. <고도>의 무대는 길의 양상, 나무의 위치와 형태, 돌의 위치와 형태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을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격 및 주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장면 구성은 매우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다.

2.2.1. (route)

<고도>에서 제시된 ‘route’는 보통 또는 도로로 번역할 수 있다. ‘route nationale’은 국도이며, ‘route goudronnée’는 아스팔트길이다. 인생에서의 여정, 진로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고도>의 무대가 되는 길은 불특정 사람들이 오가는 길, 좀 더 분명하게는 시골길이다. 그런데 시골길 하면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정겨운 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시골길은 매우 황량하다. 에스트라공에 따르면 이 지역의 이름은 ‘Merdecluse’이다. 이 단어는 너절하고’, ‘시시하고’, ‘혼란스럽고’, ‘형편없는뜻을 지닌 ‘merde’산협(山峽)’의 뜻을 지닌 ‘cluse’의 합성어로써, 이 장소가 너절하고 형편없는 고산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블라디미르가 “cette tourbière.”(이탄지)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토탄이 퇴적된 회색의 땅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극 시작에 줄곧 돌 위에 앉아 있던 에스트라공이 일어서서 무대의 사방을 둘러보며 “Endroit délicieux.”(매력적인 장소네) “Aspects riants.”(보기 좋은 모습이군)하고 말하는 것은 어스름하고 황량한 풍경에 대한 반어법인 셈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에스트라공은 주위를 둘러보고 결국은 “cette saloperie”(이 더러운 것들 좀 봐)라고 말한다. 한편 2막에서 에스트라공이 잠깐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돌아오자 블라디미르가 멀리까지 갔었냐고 묻는다. 이에 에스트라공은 언덕 근처(au bord de la pente)까지 갔었다고 대답한다. pente의 사전적 의미는 언덕, 비탈, 언덕길, 비탈길, 경사지이다. 이들의 대사에서 이곳은 언덕마루 바로 아래에 있는 쟁반 같은 고원(高原)으로 높고 경사진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막에서 여기가 어디냐는 포조의 질문에 대해 블라디미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요. 닮은 것들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나무 한 그루 있네하고 대답한다. 또한 포조는 여섯 시간 동안이나 걸었지만 두 주인공을 만나기까지 살아있는 영혼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종합하면 이곳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이며, 높은 곳에 위치한 고원이며 좀 더 위쪽으로 언덕배기가 있으며, 이탄지의 회색 공간이다. 또한 이곳은 춥고 을씨년스럽다. 아울러 두 주인공은 이른 저녁부터 밤이 되어 잠을 자러 가기 직전까지 이 공간에 머물러 있으므로, 달빛에 비친 어스름한 색채는 우울하고 어두운 회색 톤을 더욱 강조한다. 결국 무대는 고독하고 메마른 사막처럼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방이 툭 터진 광야의 비탈진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로제 블랭의 연출도 그렇거니와 각국의 많은 연출에서 무대의 분위기가 회색빛의 암울한 톤으로 제시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2.2.2. 나무(arbre)

이곳은 불분명한 곳이지만 하나의 지표로써 작용하는 것이 바로 나무다. “나무 한 그루의 무대지시를 보충해주는 인물들의 대사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나무가 버드나무처럼 잔가지가 늘어져 있으며, 잎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는 말랐거나 죽었을 것이다. 또한 나무의 종류가 명확하지 않으며 소관목과 교목의 의견 차이에서 나무의 크기가 어중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인하고 튼튼한 나무가 아니라 허약하다. 버드나무 종류 중 수양버들은 ‘saule pleureur’이다. ‘pleureur’울기 잘하는’, ‘가지가 늘어진의 뜻이다. 즉 에스트라공의 대사 눈물이 다 마른 모양이네는 마른 수양버들을 함의한다. 에스트라공이 나무 뒤에 숨으려고 했을 때 나무는 왜소해서 거의 가려지지 않는다. 결국 나무는 기대와 절망, 공간적 불확실성과 물리적 구속, 생명의 지속과 공허의 공존이라는 무대 이미지 전체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고 할 수 있다.

2.2.3.

극작품에는 나무와 마찬가지로 돌의 위치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인물들의 대사에도 돌과 관련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다. 돌의 위치, 종류, 형태, 크기에 대해서는 연출가가 임의로 결정해야 한다. 단 한 가지 중요한 정보는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걸터앉는다는 사실이다. 뾰족하지 않으며 너무 크지 않아 앉을 수 있는 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무와 돌의 위치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결정하며 고유한 동선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1막은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 신발을 벗으려고 애쓰는 것으로 시작된다. 잘 벗겨지지 않은 신발을 벗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블라디미르가 등장하는데, 그는 에스트라공을 곧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잠시 후 그는 우연히도 돌 위에 앉아 있는 에스트라공을 발견한다. 이 장면에서 돌은 블라디미르가 등장하는 쪽과는 다른 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전체에서 돌 위에 앉는 것은 오직 에스트라공 뿐이다. 넘어졌을 때를 빼놓고는 항상 서 있는 블라디미르와는 달리 에스트라공은 자주 앉는다. 나무가 서 있음, 블라디미르의 공간이라면, 돌은 앉음 그리고 에스트라공의 공간이 된다. 돌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는 때와 앉아서 하는 행위들로부터 돌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돌은 휴식을 뜻한다. 에스트라공은 돌 위에 앉아 신발을 벗으려 한다. 신발 끈을 조이는 것이 여정의 시작이자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신발 벗음은 휴식이다. 럭키에게 채여 다리에 상처가 났을 때 에스트라공은 돌 위에 앉는다. 또한 에스트라공이 잠을 청하는 곳도 바로 돌이다. 1막에서 소년이 도착했을 때 소년을 다그치던 에스트라공은 체념의 몸짓으로 돌 위에 가 앉는다. “에스트라공,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고 절뚝거리며 앉으러 가서 구두를 벗기 시작한다.” 돌의 공간은 구두를 벗는 휴식 또는 죽음의 공간이며, 망각의 공간이며, 고독, 무관심의 공간인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에스트라공이 꿈속을 헤맬 때 블라디미르의 의식은 더욱 명료해진다는 점이다. 에스트라공이 잠을 자는 동안 블라디미르는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며, 소년과 고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명료한 의식의 블라디미르는 돌 위에 앉아 잠들어 있는 에스트라공과 더욱 선명하게 대조된다. 따라서 잠을 자는 돌의 공간은 밤의 세계이며, 무의식의 장소이며, 꿈의 공간이며, 비현실적인 곳이다. 에스트라공이 앉는 돌의 공간은 전반적으로 휴식을 갈망하며, 상처 입은 자가 위안 받기 원하는 공간이다. 소년을 통해 고도에 집착하는 블라디미르와는 달리, 돌에 앉아 꿈을 꾸는 에스트라공에게 돌의 공간은 최소한의 안식처를 원하는 자의 공간이다. 에스트라공은 돌 위에 앉아서 마치 모태 안의 태아 같은 자세를 취한다. 돌은 에스트라공을 은유한다. 그것은 땅이며, 물과 같은 하강이며, 육체다. 나무와 돌은 대조를 통해 성격이 다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대변한다. 그런데 양지와 음지, 삶과 죽음을 지향하는 상반된 두 인물이 결코 헤어지지 못하는 것은 나무와 돌, 이성과 감성이 피차 독단적인 영역이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니체가 언급한 것처럼 갈등과 화해의 질곡 속에서 조화롭게 존재해야 한다는 전언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2.4. 모자와 신발

극작품 속의 네 인물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으며 신발을 신고 있다. 그 곳이 여정을 의미하는 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모자와 신발은 상황에 적절한 오브제가 된다. 그런데 유독 신발과 관련된 인물은 에스트라공이며, 모자는 럭키와 연결되어 있다. 발의 오브제인 신발은 움직임, 노동, 작업, 떠남을 상징한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관습, 도그마, 법률에서 벗어나려는 힘든 첫 여정이라는 해석도 있다. 첫 장면에서 에스트라공은 돌 위에 앉아 신발을 벗으려고 애를 쓴다. 에스트라공의 행동에서 분명한 것은 신발을 벗으려 한다는 사실과 신발이 발보다 작다는 것이다. 신발 벗기가 돌 위에 앉아 행해진다는 사실, 꽉 낀 신발 때문에 발이 아팠다는 사실에서 신발-돌은 에스트라공에게 있어 휴식, 안식을 의미한다. 노력 끝에 겨우 신발을 벗게 된 에스트라공은 발에 바람을 쐰다. 족쇄와도 같았던 불편한 신발에서 벗어난 에스트라공의 신발 벗음은 평안, 규칙에서의 해방, ,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편, 인물들 사이에 모자 놀이는 빈번하다. 블라디미르는 말을 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모자를 벗어 살핀다. 그것이 일종의 시간벌기, 놀이의 몸짓일 수도 있지만, <고도>에서 모자는 생각하기로 이어진다. 모자는 특히 럭키 그리고 블라디미르와 긴밀하다. 2막에서 블라디미르는 자기 모자를 버리고 럭키의 모자를 쓴다. 럭키는 모자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는 모자를 씌워줘야 한다. 반대로 끝날 줄 모르는 럭키의 장광설을 제지하는 방법은 오로지 모자를 벗기는 것이다. 세 사람이 달려들어 럭키의 모자를 벗기자 비로소 그는 입을 다문다. 블라디미르는 럭키의 모자를 살펴보고, 포조는 그에게서 모자를 빼앗아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발로 지근지근 밟는다. 움직임의 발을 신발과 연계시키고, 머리에 쓰는 모자를 생각의 근원지라는 발상이 재미있다. 에스트라공과 럭키가 발이라면 블라디미르와 럭키는 머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을 바탕으로 <고도>의 장면 분석에서 다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이곳이 길이라는 것은 비정착, 도중, 미완성, 왕래(움직임), 열려 있음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사실이다. 공공의 장소인 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만인의 것이다. 노숙자도, 유산계급도 공평하게 왕래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길 위의 존재는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고 있으며 포조와 럭키처럼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다. 모자와 신발이 중요한 의미로 나타나는 것은 이곳이 길이기 때문이다. 길에서의 만남은 블라디미르-에스트라공 쌍과 포조-럭키 쌍의 만남처럼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만남이다. 두 주인공이 길에서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그 기다림이 우연적이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 방향의 불분명성이다. 넓은 회색의 고원에서 한 줄기 획처럼 그어진 길은 어느 쪽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종류의 길은 뚜렷한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기다림의 대상도 애매한 상태가 된다. <고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등퇴장 방향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도 바로 이곳의 방향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방향에 대해 무지하다. 대살육의 세계대전을 통해 죽음의 체험과 뼈저린 고통의 질곡을 지나면서 방향감각의 상실을 목격한 베케트는 그 상실감을 극작품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방향을 알 수 없는 황량한 대지에서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들 그들은 바로 극작가 자신이자 두 주인공들인 것이다. 셋째, 이곳은 비현실적이며 비논리적 공간이다. 모든 기억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 있는 곳, 어제 일조차 알 수 없는 곳, 놀이나 유머 같은 비논리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 실제 같지만 실제가 아닌 이곳은 꿈속이나 무의식과도 같은 공간이다. 인물들이 갑자기 눈이 멀거나 귀를 먹는 것도 그렇고, 시간 개념이 해체되어 하루 사이에 나뭇잎이 돋을 수 있는 초자연적 현상도 이곳이 비논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물들의 언어가 논리적이지 않고 간접적, 순환적, 병렬적인 것도 이곳이 꿈과 같은 비논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1막과 2막 사이에 달라진 것들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1 2
나무 나뭇잎 없음(죽은 나무) 나뭇잎(살아있는 나무)
소년
어제 온 적이 없다고 한다
포조 시력이 좋다 장님(시각 중심주의 해체)
럭키 말을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 벙어리(-사유의 도구)
길다 짧다
모자 럭키의 모자 새 모자
신발 꽉 낀다. 검정색 헐겁다. 노란색 푸른색. 다시 꽉 낀다

넷째, 이곳은 외적으로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닫혀 있는 공간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인마냥 결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정서 불안증에 시달리는 에스트라공은 이곳에서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서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차가운 돌에 앉아 잠을 청하는 것뿐이다. 포조와 럭키가 등장할 때, 낯선 소리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지만 도망칠 수가 없다. 2막에서는 어둔 밤이 오기 전에 떠나려고 시도하지만 주저앉고 만다. 그는 두려움이 밀려오면, 블라디미르에게 안기거나, 구석에 가서 몸을 낮추거나, 빈약한 나무 뒤에 숨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곳의 인물들은 폐쇄된 공간에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막상 문이 열리자 멈춰서고 마는 <출구 없는 방>(Huis Clos)의 인물들과 흡사하다. 그런데 열려있는 것 같지만 그곳을 결코 떠날 수 없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간은 두 종류가 있다. 머물고 싶은 곳과 떠나고 싶은 곳. <고도>의 공간은 당연히 후자지만 불행하게도 전자도 포함한다. 마치 이 세상처럼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곳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가 보기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둠이 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도가 오는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잠을 잘 수도 꿈을 꿀 수도 있겠지만, 그는 결코 잠들 수가 없다. 기다림에 지친 블라디미르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둘째, 죽음이야말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목을 매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닫혀 있는 현 공간에 존재하는 한, 그들은 결코 목을 매달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방법도 불가능할 것이다.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을 만나고 나서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블라디미르는 오늘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3. 인물 분석

3.1.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네 명의 인물은 모두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다. 인물의 신체적 결함(결핍, 제거)은 베케트의 극작품이 진보할수록 더욱 깊어진다. 블라디미르는 전립선에 문제가 있으며 허리가 아파서 마늘을 먹고 있다. 에스트라공은 발이 아파 절룩거린다. 또한 베케트가 연출에서 직접 보여주었던 것처럼 두 인물은 전형적으로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노숙자나 부랑자로 설정된다. 체형을 보면 블라디미르는 마르고 근육이 있는 모습(싸움, 권투)으로, 에스트라공은 좀 더 가볍고 퉁퉁한 모습으로 설정된다.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 비해 가벼운 것은 확실하다. 자주 몸이 아프다고 말하고, 먹을 것을 찾는 에스트라공은 몸으로 기억하는 존재며 블라디미르는 그 대척점에 있는 존재다. 블라디미르는 주머니에 당근과 무를 넣고 다니지만 정작 자신은 먹지 않고 에스트라공에게 제공한다. 나무와 돌에서 확인한 것처럼 블라디미르가 나무, 이성, 의식, 깨어 있음, 서 있음, 정신적 존재라면 에스트라공은 구두, , , 음식, 앉아 있음, 육체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블랭의 초연에서는 인물들의 의상이 변별력이 없었지만, 1978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에서는 대폭 수정된다. 초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똑같이 검은 색 의상을 착용하지만, 1978년 공연은 베를린 공연에서처럼 대칭의 옷을 착용한다. 블라디미르가 줄무늬 바지를 입고 검은 색 웃옷을 착용한 반면, 에스트라공은 줄무늬 웃옷에 검은 색 바지를 착용하였던 것이다. 초연에 비해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은 포조와 럭키에 대해서도 상당한 변화를 준다. 덩치가 커진 포조의 의상과 구두는 더욱 낡고 면도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좀 더 밝은 톤의 의상을 차려입은 럭키는 왜소해진 몸 때문에 상대적으로 들고 있는 짐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이러한 두 쌍의 인물들의 대립은 몸의 크기, 의상, 연기에 있어 마치 거울에 비친 듯한 모습이다.

3.2. 포조와 럭키

채찍을 들고 있는 포조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먹을 것과 땅 소유에 관심이 많고 채찍으로 럭키를 몰아대는 포조의 모습은 부르주아를 상징하며 브레히트도 이 점에 주목했다. 또한 2막에서 넘어지면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착안하여 연출가들은 포조를 큰 덩치의 비만으로 설정했다. 초연에서 포조를 맡은 장 마르탱은 포조를 파킨슨병 환자로 설정했으며, 심장병 환자로 해석한 연출가도 있다.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포조와 럭키가 육체와 정신을 함의한다면 정신이 육체의 노예가 되는 셈이다. 포조-럭키의 쌍이 비극적인 것은 이런 까닭이다.

작품을 분석함에 있어 요소들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사고의 다양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지만 일목요연하게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고도>의 공간과 인물에 있어 쌍을 이루는 이원론적 대립으로부터 변증법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등장인물 이외에도 모자와 구두와 나무와 돌, 무와 당근과 같은 것이 쌍으로 등장한다. 쌍을 이루는 인물들과 공간은 인간의 내부와 외부로 볼 수 있고 정신과 육체로 나눌 수 있다. 블라디미르가 정신, 하늘, 모자, 기억, 현실이라면 에스트라공은 육체, , 신발, 망각, 비현실이 될 것이다.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
나무
모자 신발
서다 앉다
럭키 포조
이성 감성
하늘
현실(깨어있음) 비현실(, )
기억 망각
정신 육체
의식 무의식
밝음(), (), 남자 어둠(), (), 여자
죽음
자아(Ego) 그림자(shadow)

3. 희곡에 대해 질문하기

1)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극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2) 고도는 누구인가? 여러분에게 고도는 누구인가?

3) 주인공들은 왜 고도를 기다리는가?

4) 장면 만들기에서 주목해야 할 오브제는 무엇인가?

5) 1막과 2막 사이에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나뭇잎이 피어난 것은 무슨 의미인가?

6) 나무와 돌은 인물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7) 장면 만들기에서 나무와 돌의 위치는 어디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8) <고도를 기다리며>가 어떤 점에서 부조리극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9) 데리다가 베케트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인가?

4. 공연사에서 주요 작품

4.1. 서양 연극사에서의 공연

<고도>의 공연은 보통 3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블랭의 연출기로 바빌론 극장(1953)부터 코메디 프랑세즈(1978)까지며, 2기는 1974년 베케트의 베를린 쉴러 극장에서 공연 이후 그의 연출에 영향을 받은 연출가들이 독자적으로 연출을 시도한 시기로써 아스무스와 크레이차의 연출이 대표적이다. 3기는 70-80년대의 독창적 연출가의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시기다.

4.1.1. 1: Roger Blin의 연출 시기. 바빌론 극장(1953)부터 코메디 프랑세즈(1978)까지

4.1.1.1. 블랭의 연출

맨 처음 <고도>는 연출가와 공연장을 찾지 못해 공연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베케트의 작품을 읽어본 블랭은 <엘레우테리아>(Eleutheria)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지만 등장인물이 17명이나 되는 까닭에 이를 포기하고 <고도>를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베케트는 공연 연습에 참여하여 캐스팅과 무대 장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였다. 공연장을 찾는 것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다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바빌론 극장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배우이기도 한 블랭은 에스트라공의 역할을 원했으나 베케트의 조언에 따라 럭키 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포조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중도에 하차하게 되면서 블랭은 포조 역을 맡게 되고 대신 장 마르탱이 새롭게 합류하여 럭키 역을 맡는다. 연출가는 처음에는, 두 인물이 흰 가운을 입고 등장하여 몸을 푼 다음 가운을 벗어던지는 식의 서커스 공연을 생각했지만 이런 양식이 2막에서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포기를 하고 만다.(Roger Blin, 1986, pp.84-85)

연출가가 고민 끝에 완성한 무대는 <고도>의 전형이 된 무대, 빈 공간에 나무 한 그루와 돌이 있는 황혼의 무대가 되었다. 베케트는 배우에 대해 특별히 주문한 것은 없었고 다만 중절모자를 강조했다.(Odette Aslan, 1990, p.139) 인물에서는 블라디미르를 지식인으로 설정하고 학자 스타일의 낡은 코트, 장미색 스웨터, 검은 넥타이를 착용하게 하였다. 에스트라공 역시 검은 넥타이에 낡은 코트를 입었다. 포조는 검은 색의 영국식 의상을 입었으며 럭키는 프랑스 스타일의 황금색 제복을 입고 예속과 복종을 표현하였다.(같은 책, p.114) 전체적으로 어릿광대와 같은 의상과 희극적 분위기의 인물들은 황량한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인상을 풍겼는데, 이 스타일은 이후 공연의 전형이 된다. 베케트는 초연에서 희극성과 비극성이 동시에 드러나기를 바랐으며 본인이 직접 연출한 베를린 공연에서는 희극성이 더욱 강조된다.

4.1.1.2. 독일에서의 <고도>

1953<고도>는 독일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칼 하인츠 스트룩스 연출로 베를린 슐르스파크 극장에서 <우리가 고도를 기다리며>(Wir warten auf Godot)라는 제목으로 공연이 된다. 쥬르캄프 출판사에서 출간된 독일어 제목은 ‘wir(우리)’가 빠져 Warten auf Godot가 된다. 한편, 브레히트는 번역본을 읽고 1막 전반부에 간략한 주석을 단다. 그는 <고도>의 공연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직접 무대로 만들고 싶어 했다. 브레히트는 블라디미르를 지식인으로, 에스트라공을 무산자로, 포조를 지주로, 럭키를 광인 또는 경찰로 설정하고자 했다. 이 도식에 따른다면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대사를 말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한 때 에스트라공은 시인이었다는 말하는데, 이 대사는 무산자 에스트라공의 대사가 아닌 지식인 블라디미르의 대사가 될 것이다. 또한 브레히트는 “<고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반향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한다. 예를 들어 에스트라공의 대사, “이 세계가 너에게 충분하냐?”같은 대사를 삭제한다거나, 에스트라공 대신 블라디미르를 잠들게 하여 무산계급인 에스트라공으로 하여금 지주인 포조와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은 사회를 집단투쟁의 장으로 간주하는 브레히트의 생각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시도는 성사되지 않았다. 브레히트와 베케트는 근본적으로 사회와 연극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 독일 실러(Schiller) 극장에서 베케트가 스스로 연출한 <고도>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앞서 말한 것처럼 희극성이 더욱 강조되어 균형을 꾀하였고 전반적으로 대칭 또는 대조를 강조하였다. 베케트가 독일어 <고도>의 연출을 직접 하기로 결정한 것은 <고도>의 초연에 불만이 있었고, 자신의 의도대로 연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적 무대보다는 양식화된 연극을 선호하였다. 베케트의 연출노트는 무대에서 연기에 대한 전반적인 형태와 세부사항 말과 행동의 울림과 대칭, 대립, 대칭 강조, 연기와 발성에 대한 수학적 정교함. 희극성 부각 - 에 대한 극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4.1.2. 2: 1974년 베케트의 베를린 쉴러 극장에서 공연 이후 그의 연출에 영향을 받은 연출가들이 독자적으로 새로운 연출을 시도한 시기이며 아스무스와 크레이차가 대표적이다.

4.1.2.1. 오토마르 크레이차(Otomar Krejča)의 연출

1978년 아비뇽 연극축제에서 크레이차는 블랭의 연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추구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공연은 베케트의 독일 공연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78년 아비뇽 연극축제 때 3,000명의 관객이 운집한 교황청 안마당의 무대에서 <고도>를 공연한다. 이 공연은 이듬 해 다시 아비뇽 연극축제에서, 1980년 파리의 부프 뒤 노르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등 2년 동안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에서 순회 공연한 후, 1985년 파리의 아틀리에 극장에서 다시 공연한다. 무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것은 직경 12미터와 8미터의 흰색의 타원형 공간이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이 타원형 공간은 관객의 눈앞에서 힘의 관계가 벌어지고 있는 권투 링을 구현하고 있다.” 무대의 흰 색과 검은 색의 대조는 인물들의 의상에도 적용된다. 흰 색의 의상을 착용한 소년은 타원형을 맴돌 뿐 결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반면 무대 안의 모든 인물들은 검은 색 의상을 착용하고 있다. 또한 베를린 공연처럼 비극성과 희극성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

4.1.2.2. 발터 아스무스(Walter Asmus)의 연출

1989년 아스무스는 샌 퀀틴 드라마 워크숍의 배우를 이끌고 <고도>, <놀이의 끝>,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를 텔레비전용으로 제작한다. 베케트는 자신의 감독 하에 자신의 연출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전제로 제작을 허용한다. 베케트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을 하면서 그의 연출 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던 아스무스는 필름제작에서 베케트의 조언을 구했고, 완성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연출과 발터 아스무스 감독이라는 라벨을 붙여 배급한다.

아스무스의 <고도>는 희극적이기보다는 시적이다. “속도가 더욱 느리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관계가 더욱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감동적이며 포조와 럭키의 관계는 명백히 덜 폭력적이다.” 1막의 시작은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애쓴다의 무대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신발을 벗으려 애쓰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극작품에서 제시된 것처럼 블라디미르는 무대 밖에서 등장하지 않고 이미 무대 안에 있다. 2막의 시작에서도 극작품에서는 블라디미르가 먼저 등장해서 노래를 부르고 다음에 에스트라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스무스의 <고도>에서는 이미 두 사람이 등장해 있다. 블라디미르가 움직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는 동안 에스트라공은 미동도 하지 않고 관객에게 등을 보인 채 한 쪽만을 응시하고 있다. 나무와 돌의 형태와 위치, 인물들의 대조적인 모습, 의상 등이 베케트의 이분법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4.1.3. 3기 연출가의 시대 : 70-80년대 이후

새로운 연출가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독창적인 연출이 선보이면서 기존의 전형적 연출에서 탈피한 시기다. 극작품의 해체적 해석이 이루어지며, 1989년 베케트의 죽음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4.1.3.1. 1972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극단 탄생은 폐쇄된 공장에서 <고도>를 공연한다. 이 공연의 배경은 68혁명의 스프레이 낙서가 어지럽게 펼쳐있는 공허한 창고의 벽이다.

4.1.3.2. 1976년 장 폴 파레와 미레유 라로슈가 공동으로 연출한 <고도>의 무대는 카날 생 마르탱의 선상이다. 배우들은 진흙에서 뒹굴다가 점점 진흙상으로 변한다.

4.1.3.3. 1990년대의 연출가들은 사회상을 반영하며, <고도>를 통해 실업자 문제, 노숙자 문제를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1991 조엘 주아노(Joël Jouanneau)의 연출로 아망디에 극장에서 공연된 무대는 도시 교외의 모호한 장소로 설정된다. 이 공연에서 연출가는 나이가 많은 블라디미르와 젊은 에스트라공을 설정하여 1990년대 프랑스에서 급증하는 소외된 군상들을 제시한다. 50년대 노동자 의상을 입은 늙은 블라디미르와 90년대 의상을 입은 젊은 에스트라공 사이에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생겨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에스트라공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연출은 에스트라공을 통해 절망을 지나 막다른 길에 도달한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젊은이의 생각을 듣고 있는 것이다.” 무대장치도 소외된 현대인들을 부각시킨다. 무대는 나무 대신 전선이 빼곡히 늘어져 있는 전신주를 배치하여 교외의 황폐화된 공단지역으로 설정하였다.

4.1.3.4. 1993년 필립 아드리앵(Philippe Adrien)의 연출은 호평을 받은 공연으로써 몽환적이고 우울한 색채가 강하다. 연출가의 해석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인물들은 여전히 소외된 자들이고 부랑자지만 블라디미르를 과거에 권투선수 경력이 있는 인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계속해서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에스트라공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블라디미르가 권투에서 맞아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드리앵의 무대는 넓고 깊은 공간으로 잿빛의 모래를 깔아 인물들의 움직임에 따라 발자국이 나도록 하였다. 조명은 역광 사용을 많이 하여 인물들의 실루엣을 강조하였다.

4.1.3.5. 1995년 알랭 티마르(Alain Timar)는 아비뇽 연극축제에서 아프리카 배우를 출연시켰다. 무대는 자동차가 있는 거대한 창고를 재현한 사실적 공간이었다. 아프리카 문화와 역사를 드러낸 공연으로써 배우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아프리카인의 절망과 기쁨을 표현하였다.

4.1.3.6. 1996년 파트리스 케르브라(Patrice Kerbrat)의 연출로 파리의 롱 포앵 극장에서 공연된 <고도>는 주아노의 공연처럼 1990년대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무대는 길쭉하고 배경은 푸른색이며 Route à la Campagne, avec arbre라는 네온사인이 무대 위에 걸려있다. 2막에서 네온사인의 글자가 완전히 거꾸로 되어 engapmaC al á etouR”가 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낡은 외투 대신 검은 색 외투와 빛나는 검은 색 구두를 신고 있다.

4.1.3.7. 뤽 봉디의 연출로 1999년에 로잔의 비디 극장과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2000년에 런던에서 공연된다. 연출가는 극작품과 무대지시를 충실히 따르지만 배우들이 침묵하거나 이야기할 때 개 짖는 소리 또는 전자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무대는 눈이 쌓인 시골길로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들은 수시로 미끄러져 뒹군다. 연출가는 배우들에게 코소보의 난민 행렬을 떠올리며 춥고 고적한 언덕에서 절망적으로 기다리는 난민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라고 했다.

4.1.3.8. 2006-2007년 시즌은 베케트 100주년 탄생의 해로써 특별히 르네 쉐노(René Chéneaux) 연출로 장 빌라르(Jean Vilar) 극장에서 <고도>가 공연되었다. 2007년 아산 카시 쿠야테의 연출의 <고도>와 폴 찬(Paul Chan) 연출로 뉴올리언스에서 공연된 <고도>가 있다.

4.2. 국내 공연

최근 신구와 박근형 두 배우의 하모니로 공연되고 있는 <고도>가 전국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국내 공연에서 <고도>하면 극단 산울림과 연출가 임영웅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고도>는 산울림의 창단 공연(1969년)일 뿐 아니라 현재까지 숱한 화제를 뿌리며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공연되었다. 산울림의 <고도>에서도 나무의 형태에 대해 무척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공연 팸플릿과 정우사에서 발간된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와 있는 삽화들을 비교해 볼 때, 산울림의 나무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현의 모습, 마치 의문부호와 같은 힘차고 날카로운 나무의 모양은 1990년대에 들어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여러 무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나무의 형태는 세 개의 가지가 축 늘어진 모양이다. 초기에 산울림의 나무도 이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보잘 것 없던 나무가 여러 해를 거치면서 끝이 뾰족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나무로 변모한 것은 어인 일일까? 땅을 향해 쳐져 있던 줄기가 힘줄이 서고 날렵해진 모습으로 하늘을 향하는 것은 혹시 작품 전반에 대한 연출가의 해석이, 허무와 부조리한 측면에서 조금은 낙관적인 쪽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이성과 감성으로, 니체 식의 표현에 따르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정신과 육체, 조형적 예술과 비조형적 예술, 낯과 밤으로 환유시킬 수 있다면, 위태롭긴 하지만 이들이 반목하지 아니하며,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헤어지지 않고 힘겨운 인생을 함께 하는 모습에서 조금은 희망적인 메시지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 마치 최후의 완성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존재하는 정점의 공간이 정말 고도를 만날 수 있는 골고다 언덕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 무대 한 가운데 엄청나게 큰 바위와 멋진 나무가 서 있을 수 있을까? 산울림에서 보여준 전반적인 인물에 대한 해석, 무대의 분위기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게 한다. 등장인물들은 매우 희극적이고, 그들은 제법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움직임과 언어가 율동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재미를 주어 극 속으로 이끄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 다만 극이 끝난 후, 재미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부조리한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한편, 배우들의 동선을 결정하는 나무와 돌의 위치 역시 연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 사항이다. 나무와 돌을 한 가운데 둘 것인가, 같이 둘 것인가, 떼 놓을 것인가, 떼 놓는다면 간격은 어떻게, 위치는 어떻게 정해져야 하는가? 물론 텍스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산울림의 <고도>는 무대의 한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위의 한 가운데 나무가 우뚝 서 있다. 따라서 인물들이 바위에 걸터앉게 되면 나무에 등을 지게 되며 커다란 바위가 무대 한 가운데 둥글게 놓여 있으므로 360도 아무 데나 걸터앉을 수 있다. 앉아 있는 상태에서 관객에 등을 질 수도 있고 관객을 응시할 수도 있다. 무대 중앙에 놓인 바위와 나무는 이러한 장점이 있다. 이에 반해 고정된 상태에서 무대의 중앙을 상당 부분 차지하는 것은 인물의 동선에 방해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고도>에 관한 한 산울림은 역사와 전통뿐만 아니라 해석과 연기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공공연히 받아 온 만큼 커다란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 연출자와 극단이 삼십여 년 동안 한 작품을 끈기 있게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쉽사리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대중성과 상업성에 귀가 엷어져 쉽사리 레퍼토리를 바꾸는 연극계의 현실을 바라볼 때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또한 <고도>는 반복되는 공연을 통해 정해진 무대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수정보완 작업을 한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 역시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조리 연극의 전형으로 현대 연극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고도>가 우리 말로 번역되고 국내의 극단에서 해석되어 각 국을 순회하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우리의 연극적 자질 및 문화의 보편성과 인간의 원형성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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