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연극의 미래를 논할 때 '전통'과 '시대성'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다.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변화하는 가변적 개념이다. 한 문화권의 새로움은 기존 전통 위에 겹겹이 쌓인 결과물이다. 따라서 '새로운 한국 연극' 또한 전통적인 한국 연극과 무관할 수 없다. 아무리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라 해도 한국인이 한국에서 만드는 연극은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과 한국어라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또한, 연극은 사회적, 시대적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시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령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라는 새로운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예술이다. 이처럼 시대성은 시대정신은 물론 문화와 기술의 발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21세기 한국 연극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바탕으로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현대 예술의 두 가지 큰 흐름인 '추상*과 '일상'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연극의 미래를 개략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추상'이라는 한자는 '뽑아낼 추(抽)'와 '코끼리 상(象)'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양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실제 사물에서 어떤 특징을 추출해 내는 작용을 뜻하며, 이는 구상(具象)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현대 예술의 특징이 추상이라지만, 추상이 21세기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미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원시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은 구체적으로 그렸으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을 표현할 때는 추상을 사용했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자연적 현상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닌 모호하고 어렴풋한 존재를 상상하게 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추상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상은 사물의 외형이 아닌 내면의 힘, 본질, 원형을 탐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잔이 자연을 원, 원추, 원기둥으로 단순화시키려 했던 것도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려 했던 시도다. 결국 추상 예술은 사물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힘을 표현하며, 재현에서 표현으로, 표현에서 개념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진다. 이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철학적 사색의 결과물이자, 삶에 대한 질문이며, "예술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랭보의 말과도 통한다.
연극에서의 추상은 구체의 맞은편에 있다. 고전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연극이 현실을 웅장하게 재현하려 했던 '구체화'의 시도였다면, 추상은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부조리 연극 등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상징주의 연극은 세계를 상징으로 바라보고,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했다. 이처럼 추상적 연극은 현실의 재현을 넘어 내면적, 개념적, 원형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한국의 전통 연극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전통 연극 가운데 가장 연극적인 형태인 탈놀이는 추상적 특성을 강하게 지닌다. 텍스트는 고정되지 않고, 공연 장소 또한 구체적이지 않다. 탈놀이의 원형은 벽사(辟邪) 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관객들은 탈놀이를 통해 거대한 자연의 힘이나 죽음의 세계와 만나는 경험을 한다. 놀이와 해학 속에서 사회를 비판하고 감정을 해소하는 동시에, 제의성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기회를 얻는다.
2.2.1. 연기자와 관객의 경우하회탈놀이의 경우, 연기자는 전문 배우가 아닌 마을 주민 중에서 선정된다. 그들은 정교한 기교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탈놀이를 보며 자연스럽게 기본적인 동작과 진행 과정을 익혔다. 이는 탈놀이가 단순한 공연을 넘어 생활이자 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연기자가 될 수도 있는 그들은 이미 탈놀이에 어떻게 호응하고 참여해야 하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연기자와 관객의 상호교환 가능성, 유동성, 비결정성의 추상성은 탈놀이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참여자 모두의 동참을 이끌어내어 치유적 효과와 함께 신명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2.2.2. 공간의 경우탈놀이는 극장이라는 고정된 공간이 아닌, 추수가 끝난 논이나 마을의 놀이마당에서 이루어진다. 서양 연극처럼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지 않고, 관객들이 멍석 주위를 둘러싸고 공연에 참여한다. 이는 가변적, 개방적, 비경계적, 추상적인 공간 개념을 보여준다. 이러한 추상적 공간은 여러 장점을 갖는다. 첫째, 빈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이 가능하다는 공간 확보의 용이성, 둘째, 장소가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공간 변형의 용이성, 셋째, 일상 공간이 탈놀이를 통해 신성한 제의 공간으로 변하는 공간의 전이가 그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공간에서 의상과 소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원형적 상징이 되어 텍스트의 의미를 이끌어간다.
서양의 21세기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추상적 특성이 강하다. '수행성(performativity)'을 통한 신체 가치의 재발견이나, '장소 특정적 연극(Site-specific theatre)'이 고정된 무대 대신 가변적 공간을 사용하는 것은 전통 연극의 추상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 한국 문화는 마루, 마당, 광장 같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며, 이는 연극에도 반영된다.
전통 연극에서 일상 공간을 무대화하는 것은 현실적 공간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넘어가는 **'리미널리티(liminality)'**를 의미한다. 이 통과의례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갈등을 해소했다. 이를 현대에 적용한다면, 아파트, 직장, 학교 같은 일상적 공동체 생활공간을 연극적으로 해체하여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고, 다시 신성한 공간으로 전환함으로써 개인의 갈등은 물론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원한을 풀어내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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