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브레히트(1898~1956)는 서사극이라는 연극 양식을 창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감정 이입에 기반했던 기존 연극에 반기를 들었다. 또한 주관적이고 낭만적이며 과장된 표현주의 연극 역시 비판했다. 그는 디드로와 마찬가지로 감성보다 이성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연극은 사회 변혁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연극이 극작가의 시녀가 아니라 사회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사극은 '거리두기(이화작용)' 수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서사극의 연기술은 기존의 연기와는 차별화된다.
서사극의 연기술 원칙
서사극에서 배우의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사실이나 현실이 아니라 '연극일 뿐'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인지하도록 하는 데 합당해야 한다. 무대는 관객에게 또 다른 현실이 아닌, 단지 사건이나 현실의 '예시'일뿐이다. 배우와 관객 모두 이 예시를 객관적이고 냉정한 상태에서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현실에서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처럼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는 무대에서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며, 결코 무대에 감정을 이입시켜서는 안 된다. 물론 배우 또한 이를 염두에 두고 연기해야 한다. 배우는 자신의 배역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태도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한 인물을 예시해야 한다. 즉, 배우는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전달하는 전달자이자 보고자의 역할을 한다. 서사극의 배우는 연기의 목적이 무대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모순을 제시하는 데 있음을 명심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관객을 바라보며 관객을 감정 이입 상태에 빠뜨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서사극의 연기는 감정을 이화시키는 '제시'의 연기이다. 서사극의 공간은 배우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관객과 토론을 벌이는 장소가 되며, 이에 동참한 관객은 극적 환상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배우가 배역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는 디드로의 사고방식과 매우 유사하며, 서사극의 거리두기 의미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거리두기는 예술과 현실을 분리하고, 무대 위 행위가 인공적으로 제작된 것이며, 배우와 극 중 인물이 동일하지 않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브레히트가 비판했던 사실주의 및 표현주의 연극의 주된 연기 방식은 배우가 등장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외적으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극에서 최상의 연기는 배우의 미세하고 내면적인 심리를 관객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세밀한 심리 묘사에 집착하는 연기가 신체적 표현 가능성을 약화하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인식시키는 데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서사극에서 시선이나 표정 연기 대신, 사회적 변형을 이룰 수 있고 신체를 활성화하며 관객을 교육의 장으로 이끌 수 있는 연기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신체 언어인 게스투스(Gestus)이다. 결국 서사극에서는 배우의 '몸'이 연극의 주체가 된다.
게스투스 (Gestus)
서사극에서 배우는 자신의 성향이나 사회적 관점을 관객에게 분명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사회적 태도, 즉 게스투스라고 명명한다. 라틴어로 '몸짓', '태도' 등을 뜻하는 게스투스는 서사극의 핵심 요소로,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 원칙을 게스투스 원칙으로 대체했다. 게스투스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다. 사회적 몸짓의 총체적 태도인 게스투스는 계층에 따른 인간들의 독특한 행동, 말투, 습관 등이 포함된 종합적인 것으로, 등장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상황을 나타내는 사회적 몸짓이다. 따라서 배우는 게스투스를 제시함으로써 그 인물의 사회적 특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관객은 그 사회적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인간 상호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게스투스는 주관적이고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태도나 몸짓, 혹은 경제적 역량에 따른 언어와 자세는 상대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게스투스를 통해 그 인물이 어떤 사회적,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서사극 무대에서 배우는 이러한 개념의 사회적 게스투스를 어떻게 하면 정형화시키면서도 가장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시된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상대적인 게스투스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물이 무대에 존재하는 공간적 위치, 인물들 간의 거리, 그리고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서사극에서 텍스트에 대한 세세한 선행 연구는 연출가 못지않게 배우에게도 필수적이다. 둘째, 정확한 게스투스를 제시하기 위해 배우는 평소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인간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손님과 종업원, 가족, 친구 사이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언어나 몸짓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브레히트는 배우에게 이러한 점들을 강조하며 정형화된 게스투스를 발굴하기 위한 특별한 연기 훈련을 주문했다. 예를 들어 정지 동작, 반복 동작, 느린 동작 등을 계속해서 반복 훈련시켰다.
브레히트는 게스투스를 실천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분절 언어에 비해 왜곡 가능성이 작고 진실적이며 시각적 효과가 큰 신체 언어에 주목했다. 또한 몸짓과 태도 외에 사회관계를 드러내는 언어 자체나 발성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배우의 언어와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사회적 상태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을 강조한 연출 기법에서 서사극의 게스투스 연기는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게스투스 개념은 감각에 기반을 둔 연기 양식을 목표로 한다. 흥미로운 점은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아르토의 잔혹극 개념이 극과 극에 위치하지만, 실천적 측면에서는 감각에 대한 관심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현대 다매체 공연에서 사용되는 시각과 청각 이미지의 확산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브레히트에게 있어 감각의 중시는 여전히 보다 정확한 사회 인식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사극 연기 양식의 목적과 배우의 관점
서사극 연기 양식의 목적은 무대적 사실을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사극 배우의 시선은 직접 관객에게 향한다. 이 도발적인 시선은 환각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사실주의 연극의 '제4의 벽'을 무너뜨린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벽을 허물어뜨린 후 서사극 배우는 관객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며, 심지어 말을 걸기도 한다. 이러한 연기 태도는 관객을 교육하기 위한 거리두기 효과를 극대화하며, 관객과 직접 대화하는 배우는 극 중 인물의 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 무대의 환상을 깨뜨린다.
토론의 장이 된 서사극 공간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진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과거 연극이 일방적인 관계였다면, 서사극은 양방향 소통을 추구하며 관객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서사극 무대는 어른이 아이에게 훈계하는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관객에게 현실 비판 능력을 키워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힘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사극의 배우가 취해야 하는 관점은 극 중 인물의 사회적 관점이 아니라 '배우 자신의 관점'이다. 배우에게 속하는 이러한 관점은 연극이 사회에 대한 중립적 관점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정치성을 지니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관객의 의식 변화와 사회 혁신을 목표로 하는 서사극의 목적에 합당한 것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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