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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너머의 바다를 꿈꾸다 : 연극 <엔드 월(End Wall)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공연·전시

by tardi 2025. 9. 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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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드 월>(하수민 작·연출)은 2021년 평택항에서 발생한 23세 일용직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모티브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인 하청 시스템과 노동 현장의 불합리를 다룬다. 작품은 2024년 서울희곡상을 수상하며 예술성과 사회성을 인정받았고, 2025년 9월 10일부터 28일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되었다. 나는 9월 21일 공연을 관람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극을 넘어서 “저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벽은 사고 현장의 장벽인 동시에, 우리 삶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경계와 소통의 단절을 상징한다. 연극은 벽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은유와 상징으로 사회 문제를 더욱 깊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아성, 좌절된 꿈의 주인공

무대가 열리면 아성의 영혼이 컨테이너 벽 위에 앉아 자신의 죽음을 해설하기 시작한다. 그는 벽에 깔려 죽은 직후의 순간부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반복한다. 벽이 무너지기 1분 전, 10분 전, 16분 전, 그리고 하루 전의 시간들이 소환되며, 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되묻는다.

아성의 기억 속 현장은 체계와 안전 장치가 부재한 작업장이었다. 원청-하청 구조, 열악한 노동 환경, 차별이 겹겹이 쌓여 그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떠나려 했던 여행, 실현되지 못한 희망을 떠올린다. 좌절된 꿈은 곧 그가 벽 너머 세계를 갈망하는 이유로 이어진다.


무명, 이름 없는 죽음

무명(無名)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익명의 희생을 상징한다. 그는 구체적인 삶의 기억 대신 “엄마의 말”만을 기억한다. 이 단편적 기억은 사회적으로는 지워졌으나, 최소한 엄마의 기억 속에서는 존재할 수 있다는 인간적 희망을 보여준다.

무명은 누구나 대입할 수 있는 보편적 인물이다. 한국 청년, 이주 노동자, 혹은 관객 자신일 수도 있는 그는 ‘죽음과 빈자리’를 드러내는 존재이자 아성과 함께 벽 너머를 탐색하는 동반자로 기능한다.


고래, 역사의 그림자

고래는 사할린에서 온 이주 한인 노동자다. 그는 단순한 동료를 넘어, 강제 이주와 귀향 좌절의 역사를 상징한다. 아성이 현재의 좌절된 청춘을, 무명이 익명의 죽음을 보여준다면, 고래는 과거의 그림자를 불러온다. 이 세 인물이 함께 놓일 때, 벽은 단순한 사고 현장의 장벽에서 세대·민족·역사를 가로막는 구조로 확장된다.


무대와 벽, 그리고 바다

무대 중앙의 컨테이너 벽은 한계·차단·가로막힘의 은유로 작용한다. 차갑고 희미한 조명과 그림자는 배우들을 벽에 갇힌 존재처럼 드리우며 강한 시각적 효과를 남긴다. 벽이 무너지는 “쿵” 소리는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이자 사회에 울려 퍼지는 경고음처럼 다가온다.

극의 후반부, 뒷벽이 사라지고 그 뒤에 푸른 바다가 드러나는 장면은 압권이다. 아성과 무명의 기억이 명확해지고, 그들을 막아온 벽이 무너지는 순간 바다는 해방과 가능성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것은 아성이 꿈꿨던 자유, 무명이 갈망한 존재 증명, 고래가 품었던 역사의 귀환을 동시에 상징한다.


벽 너머를 묻는 연극

<엔드 월>의 ‘벽’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 사회적·존재론적 단절을 뜻한다. 그것은 원청-하청 구조, 청년과 이주 노동자의 희생, 삶과 죽음·현실과 꿈·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경계를 모두 아우른다.

무대 위 대화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이지만, 실은 살아 있는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으로 들린다.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물음은 사후 세계가 아니라, 더 나은 사회, 성취되지 못한 꿈, 도래해야 할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요청이다.

제목 <End Wall>은 컨테이너의 끝 벽, 종말과 막다름을 뜻한다. 그러나 연극은 역설적으로 그 끝에서 바다와 바람을 보여준다. <엔드 월>은 한 청년의 비극을 추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며, 관객에게 벽 너머의 가능성을 묻는 깊이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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