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에 먹는 무화과>라는 제목이 특이하다. 꽃이 없는 과일, 무화과도 독특하지만, 이 무화과를 왜 밤에 먹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2021년 두산아트랩 쇼케이스에서 초연된 <밤에 먹는 무화과>(작가 신효진, 연출 이래은)가 202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1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극장 ‘창작ing’ 무대에 올랐다. 11월 2일 한가로운 오후, 덕수궁 돌담길에 인파가 몰려 약간 이른 단풍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을 잠시 걸은 후 세실극장으로 향했다.

무대, 지나간 삶의 복도
지정석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니 무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상수는 ‘뤽상브르’ 호텔 로비의 프런트 데스크다. 무대 안쪽 가운데에 옷장 하나가 놓여있고 하수에 두 개의 책장 사이로 설치된 창문 너머 식물들이 보인다. 무대 가운데에서 약간 하수로 치우쳐 두 개의 테이블이 있고 각각에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다. 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소의 변화 없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다만 호텔 정문이 객석 뒤에 설정되어 호텔을 출입하는 손님들이 객석을 통해 드나든다.
무대 가운데 위쪽에 스크린을 설치하여 자막을 제공한다. OTT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드라마라도 한국어 자막 제공에 갈수록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귀로 전해 듣는 것이 이따금 잘 전달되지 않는 탓이다. 다만 배우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 있다. 대사를 깜빡했을 때 애드리브 등 즉흥적인 처리를 할 수가 없고, 대사의 순서가 바뀌어도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 스크린은 자막 제공 이상의 도구로 작용했다.
무대가 사실적으로 재현된 호텔 로비라는 점은 여러 가지 것을 시사한다. 흔히 호텔은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다. 호텔 로비는 머물렀다 떠나는 장소, 스침과 만남의 장소로서, 연극에서 인생의 흐름, 관계의 일시성, 삶의 스쳐 지나감 등을 은유한다. 또한, 그곳은 주인공에서 우연의 장소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88 올림픽 당시 그녀는 호텔 이름이 바뀌기 전 이곳에서 청소부로 근무했었다. 굳이 자기 일터였던 곳에 장기 투숙한 것은 오래된 앨범을 꺼내보는 것처럼 과거를 만나보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아니면 삶을 중간 점검하듯 과거를 반추하고 새로운 동기 부여를 하려는 마음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가 삶이 후회스럽다거나 매듭지으려 하기보다는, 다시 정리하고 그 의의와 가치를 되새김질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윤숙이 보여준 조용하면서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톤, 타인에 대한 관심, 소설가로서 창작 행위 등은 여전히 삶에 대한 에너지와 동기 부여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텔은 익명의 장소다. 더구나 그곳은 윤숙이 일하던 곳으로, 과거에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손님과 대화가 금지된 과거의 청소부에서 이제 누구와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투숙객의 자격으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일까. 그녀가 계속해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또 그 속에서 잊히거나 외면받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다른 이들과의 연결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즉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려는 것은 아닐까.
연극의 줄거리 : 호텔 로비에서 만난 사람들
극이 시작되면 하수의 테이블에 윤숙이 앉아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경숙이다. 그녀가 공책에 쓴 글은 자막에서 노출되고, 그녀의 음성이 더해져 통감각적으로 제시된다. 윤숙이 왜 프랑스어 발음으로 ‘뤽상브르’ 호텔인 이곳에 장기 투숙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연극의 주제와 밀접한 것은 분명하다. 주인공 윤숙은 70대 여성이다. 70대면 뭔가 의욕적으로 새롭게 시작할 나이보다는 정리할 나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을 정리하려는 것일까? 소설을 쓰면 소설가라고 할 수 있으나 윤숙은 인터넷 검색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무명 소설가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고 집중해야 하지만, 그녀는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관심은 호텔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심심한 그녀는 소설 쓰기를 잠시 접어두고 로비에 나와 호텔 관련자 또는 투숙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낯선 사람들이 오가는 호텔 로비에서 윤숙이 그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호텔 직원이 등장하자 조식으로 먹었던 무화과에 대해 불평한다. 이어 팀장도 나오고 청소부도 등장한다. 직원들이 차례로 지나간 후, 본격적으로 호텔 손님들이 드나든다. 트렁크를 든 젊은 남자가 객석 뒤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입양된 터라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영어로 몇 마디 나눈 뒤 그녀는 잘 알아듣지 못한 영어를 메모해 둔다. 이어 두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비혼주의자인 젊은 여성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웨딩드레스 촬영을 하려 한다. 마침 이 호텔은 웨딩드레스를 대여하고 뒤편 경치 좋은 장소를 제공하는 수익 사업을 하고 있다. 나이 든 여성과 두 젊은 여성의 만남은 미혼인 윤숙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결국 윤숙도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기회가 주어진다. 나이 든 남성도 있다. 카지노 사업 때문에 호텔에 머문다는 그는 나이 든 남성 특유의 예의 없음을 보여주며 윤숙에게 무례한 질문을 쏟아낸다. 하지만 윤숙은 별로 개의치 않고 잘 받아낸다. 그리고 다시 등장한 두 젊은 여성과 함께 사진도 찍고 웨딩드레스도 입어보는 계기가 된다. 갈등이 있었다면 있었던 한국계 미국인과도 화해하고 나이 든 남자와의 관계도 그럭저럭 넘어간다. 특별히 관심을 둘만한 사건도 인물도 없지만, 그러나 그러한 평범함이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윤숙이 어떤 인물인지 그 모습이 하나씩 드러난다.
현재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과거의 인물로 경숙이 있다. 그 인물은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에서 재봉사로 일한 적이 있으며 그때 패기 넘치는 경숙이를 만났다. 경숙이는 재봉사 일을 하면서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으면 재봉틀을 가져다 팔아 함께 나눠 쓰던 동생뻘 동료다. 경숙이가 도둑으로 찍혀 교도소에 가면서 영영 헤어졌지만 그녀를 잊지 못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경숙이인 것은, 아마도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을 수 있다. 먼지 묻은 작업복을 자기 코트에 걸쳐 놓았다고 화를 내던 남자와 결혼할 뻔한 이야기도 있지만 물 흘러가듯 은근슬쩍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이 연극은 극적 갈등이 고조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구조의 연극과는 전혀 다르다. 그저 평범한 초로의 여성이 그곳의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끼고 말을 거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용하고 온정이 있는 톤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윤숙과 드라마의 전반의 잔잔한 흐름이 오히려 <밤에 먹는 무화과>의 특징이다. 무화과 맛처럼 강렬하진 않으나 먹을수록 맛이 살아나는 느낌을 준다.
관계의 온도, 삶의 결
이렇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밤에 먹는 무화과>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연극을 보면서 인간에게 관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다. 젊은 시절, 지난한 삶은 살았던 윤숙이 어떤 계기로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 삶에서 벗어났는지, 그 뒤의 삶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호텔이라는 장소, 장기 투숙자로서 심심하다는 그녀가 자기 방에서 혼자 머물러 있지 않고 로비에 나와 타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외롭거나 사람이 그립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다. 특히 말벗이 부족한 노인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외로움으로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재확인하려는 충동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이 연극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이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며 서로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런데 묘한 것은 윤숙의 개입으로 처음에 낯설어하던 그들이 조금씩 그 낯섦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관계라는 게 원래 그런 식이다. 떼래야 뗄 수 없는 친구나 부부라도 처음에는 모르던 관계였다. 누구에게나 첫 만남이 있다. 처음에 몰랐던 사람이 만남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깊은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의 만남을 생각나게 한다. 여우는 몰랐던 사람과 만나게 되고 서로 익숙해지면서, 즉 길들여지게(apprivoiser) 되면 새로운 의미들이 마구 생겨난다고 말한다. 예컨대, 육식 동물인 자기에게 밀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어린 왕자와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밀밭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황금빛인 밀은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밀밭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되겠지.”
과거가 순탄하지 않았던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윤숙의 긍정적인 언어와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살아오는 동안 윤숙은 어떤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모습은 밝다. 따라서 이 연극을 여성주의니 비혼주의니 하는 테두리로 가두는 것은 연극의 본질을 협소하게 만든다. 누구의 인생이라도 그것은 평가 대상이 아니다. 그가 살아온 것은 잘 산 것도 못 산 것도 아니다. 자신이 열심히 살았고 만족한다면 그만이다. 비록 <밤에 먹는 무화과>는 톡 쏘는 맛없이 은은하게 흘러가지만, 그 모습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여전히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는 삶을 보여준 무대인 것이다.

밤에 먹는 무화과 : 내면의 꽃을 맛보는 일
<밤에 먹는 무화과〉라는 제목은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극에서도 무화과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생물학적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꽃이 없으면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식물의 이치이지만, 무화과는 이름 그대로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다. 무화과의 열매는 바로 그 속에 숨은 꽃, 즉 보이지 않는 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평범한 삶을 살아온 윤숙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꽃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면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 숨겨진 욕망, 지워진 상처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무화과는 내면의 꽃, 숨겨진 진실, 여성성과 기억의 상징 등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왜 밤에 먹을까? 밤에 먹는 무화과는 환한 낮 동안 감춰둔 진실을 비로소 어둠 속에서 받아들이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다면 밤에 무화과를 먹는 것은 그 내면을 맛보는 일, 자신의 은폐된 진실과 마주하는 행위가 되고, 이는 곧 고통과 욕망의 인정, 억눌린 자아의 복원, 숨겨진 여성성(또는 인간성)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무화과의 단맛은 서서히, 그러나 깊게 번진다. 〈밤에 먹는 무화과〉도 그렇다. 강렬한 사건 대신 잔잔한 관계의 떨림으로 존재의 온기를 전한다. 이 연극은 화려한 꽃보다 보이지 않는 꽃을 품은 삶에 대한 헌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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