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5부작 중 2번째인 연극 <안트로폴리스II 라이오스> (각색/연출 김수정)는 2025년 11월 6일부터 22일까지 한국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인간의 도시'를 뜻하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비극 신화를 통해 폭력과 욕망이 교차하는 현대 사회와 도시의 모습을 탐구합니다. 국립극단은 이 5부작을 2027년까지 완성할 예정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배우 전혜진의 10년 만의 연극 복귀작이자 일인극이라는 점입니다. 배우는 라이오스,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 등 신화 속 다양한 인물을 목소리와 몸짓, 소품을 활용해 다층적인 독백극으로 풀어냅니다. 관객은 단일한 연기를 통해 신화적 복잡성과 심리적 갈등에 집중하게 됩니다.
독일 초연과 한국 공연 모두 여성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남성 중심적인 고대 비극에서 라이오스 같은 권력과 아버지-왕의 역할을 여성이 연기함으로써, 젠더 경계를 허물고 기존 신화의 권력 구조를 재고하게 만듭니다. 이는 신화적 남성 권위에 대한 현대적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인 캐스팅입니다.
무대 중앙에는 거대한 열 개의 계단과 왕좌가 솟아 있어 권력과 지위, 운명과 선택의 수직적 위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계단의 상하 구조는 신과 인간, 이상과 현실, 그리고 심리적 갈등(오름=욕망, 내림=죄책감)을 상징하며, 관객이 배우의 움직임만으로 극적 긴장을 이해하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무대 디자인은 고대 왕궁과 현대 도시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과거의 테베와 현재의 도시를 동시에 구현합니다.
작가는 라이오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아버지의 욕망과 폭력에서 시작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하며, 라이오스가 크리시포스 납치 및 죽음으로 저주를 초래하여 테베 몰락의 씨앗을 뿌렸음을 강조합니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다 결국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죽임을 당하며 자기 파멸로 이릅니다. 이 서사는 운명과 선택, 권력과 책임이라는 인간 보편의 문제를 탐구합니다.
특히, 라이오스가 죽는 순간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용의 피를 상징하는 푸른 물감이 몸에 쏟아지는 장면은 자기 직면과 원죄의 청산이라는 극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폭발시킵니다. 시종일관 들리는 날카로운 쇳소리는 스핑크스를 상징하며, 인간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안트로폴리스II 라이오스>는 고전 비극의 재해석을 넘어, 강렬한 무대 언어와 탁월한 연기를 통해 폭력과 욕망 위에 세워진 현대 도시의 비극, 즉 인간의 도시(Anthropolis)의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합니다. 남은 5부작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 폴 클로델 (Paul Claudel) 소개 (0) | 2025.11.18 |
|---|---|
| 상징주의 연극 미학 (1) | 2025.11.17 |
| 피나 바우슈의 <카네이션(Nelken)>, 삶의 본질을 파고든 총체 예술의 혁명 (1) | 2025.11.08 |
| 보이지 않는 꽃을 맛보다 : 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 (0) | 2025.11.05 |
| 연극 고트(Gott), 존엄사에 대한 공청회 (2) | 2025.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