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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1)

공연·전시

by tardi 2025. 8. 17.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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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생 무수한 경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늘 지리적,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경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 경계가 있어야 하는지 없어야 하는지, 혹은 어느 정도의 경계 설정이 적당 한 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곤 합니다. 삶이란 어쩌면 스스로 경계를 만들거나 혹은 허물어가는 과정과도 같아서, 경계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지니고 끊임없이 강화되거나 약화됨으로써 우리로부터 다가섰다가 멀어지고 또 다가서기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경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이'와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공동체 의식이 필연적인 삶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직접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능력이 없음에도 인류와 영원히 함께하는 예술, 특히 연극에서도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영역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내놓지 않거나 적당한 경계에 머무는 자를 '회색분자', 혹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곤 합니다. '적당하다'는 말이 썩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하다'는 말이 '이도 저도 아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통용 가능한' 중용의 의미로 본다면, 이는 꽤나 합당한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급속한 변화로 인해 기존의 많은 구성 요소들이 빠르게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각자 고유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개성적인 존재이므로, 타인과의 접촉은 언제나 호기심, 새로움, 그리고 낯섦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접촉의 강도에 따라 타인은 평생을 함께할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기도 하지요. 이 관계 설정에서 경계가 지나치게 뚜렷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모호하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령, 자식에게 건네는 한마디가 때로는 따뜻한 훈계가 되고 때로는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는데, 훈계와 잔소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어느 정도 경계가 필요하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결국 관계 설정에 있어서 이해가 가능한 경계, 암묵적으로 설정된 경계, 그리고 그것이 상호 간에 합리적이라고 판단된 경계라면 무난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계가 이러해야 한다는 확실한 기준이 마치 잣대를 대고 선을 긋듯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만의 경계를 함께 설정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 원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설정된 경계만큼 위험한 것은 없으며, 다른 쪽에서 수긍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경계가 설정되면 조만간 관계는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개인과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불분명한 경계로 인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면, 경계는 우리 삶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새롭게 정립해야 할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연극의 경계

이 경계의 문제는 지역 간의 경계로 인한 지역감정, 수입의 경계에 따른 빈부 격차, 세대 사이의 경계로 인한 세대차이 등 인간과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어 나타납니다. 경계가 지나치게 뚜렷하거나 불분명할 때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지요. 한편, 언어는 아마도 가장 경계적인 것일 겁니다. 문법의 틀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는 품사의 경계들로 구성되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요소인 언어는 애매한 경계를 견딜 수 없습니다. 언어의 불분명한 경계는 곧 오해와 불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언어가 다르면 지리적으로도 경계가 갈립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 한국 사람이 되고 중국어를 사용하면 중국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전라도 사람이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경상도 사람인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언어는 지리적 경계뿐 아니라 인식적 경계도 만들어냅니다. 직업이 다르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세대에 따라서도 언어가 다릅니다. 언어는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주목해야 합니다. 예술 또한 각각의 고유한 언어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술의 언어는 색과 형태이며, 음악의 언어는 장단, 고저, 강약과 같은 리듬입니다. 영화의 대표적인 언어는 편집과 카메라 워크,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이며, 연극의 언어로는 배우, 무대, 나아가 관객이 있습니다. 예술은 바로 그 언어에 따라 예술 고유의 장르가 결정되지만, 요즘 들어서는 예술 언어의 경계가 점차 상호 침투적인 현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연극은 무엇보다도 경계의 예술이라 불릴 만합니다. 공연장을 필요로 하는 연극은 공연장 외부와 내부로 경계가 확실하게 구분됩니다. 공연장 외부의 사람들은 공연과 전혀 무관한 행인이지만, 내부의 사람들은 소위 '관객'이 됩니다. 관객이란 공연장 내부에 존재하면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정해진 규칙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스스로 공연장 안으로 들어왔지만, 한 번 들어온 이상 내부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연장 내의 관객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기꺼이 속임수에 빠질 자세를 지닙니다. 무대가 허구지만 허구가 아니라는 이상하고도 야릇한 믿음은 연극 존재의 전제 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즉, 관객은 무대와 동떨어진 심리적 경계에서 연극을 시작하여, 몰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덧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는 좀 특이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극 중에는 경계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무대가 무대일 뿐 현실이 아니라고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서사극은 관객이 무대에 몰입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장치들로 가득 차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서사극의 커튼콜에 이르면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사라지고 혼연일체가 되어 사회의 모순을 소리 높여 외친다는 점입니다. 서사극은 경계의 강화와 약화를 통해 관객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고도의 연극적 전략을 지닌 연극인 것입니다. 이렇듯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동화와 이화, 거리 없애기와 거리두기의 리듬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 비현실과 현실, 환상과 실제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경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객석의 역사는 곧 연극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객석의 형태와 쓰임새는 연극의 양식을 대변해왔지요. 연극의 시원으로 간주되는 각종 제의나 축제에서 객석은 마치 멍석이 깔려 있는 마당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멍석은 '판'이었고, 멍석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은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는 관객이 아니라 유동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연자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을 오므렸다가 펼쳤다가 하면서 비정형적 모양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처럼 무대와 객석의 비고정성은 소통, 혼연일체, 무형태성, 비경계성 등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연극이 입장료를 염두에 두게 되면서 객석은 엄격한 경계로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연극의 비극은 이 경계 나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무대와 객석, 객석과 객석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연극의 색깔도 변해버렸습니다. 소위 프로시니엄 무대는 무대를 객석과 확실한 경계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으며, 객석 자체에도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분명하게 구분하였습니다. 일등칸과 이등칸의 나눔처럼 비싼 입장료와 저렴한 입장료에 따른 객석의 공간적 구분은 연극의 본질적 속성을 거부하는 이적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박스의 비싼 객석은 무대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자리라기보다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이죠. 오히려 저렴한 아래층 객석이야말로 여럿이 모인 소란스러운 객석이었지만, 마치 마당에 퍼질러 앉아 소통하는 것과 같은 '판'의 자리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비싼 자리가 폐쇄된 경계였던 반면 저렴한 자리는 열린 경계였다는 것입니다. 상류층이 차지한 박스석은 안락한 의자를 제공했지만, 연극의 특징 중 하나인 관객들 사이의 역동적 전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경계의 폐쇄성으로 인해 연극의 참맛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와 하이 테크놀로지의 발전 덕택에 공연장은 더욱 거대해지고 첨단화되었습니다. 예술적 건축미가 가미된 공연장의 외관은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자태를 뽐내게 되었고, 내부는 최첨단 조명과 음향으로 통합적이고 감각적인 무대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기계가 발달할수록 인간적인 냄새는 후퇴하고 인간 사이의 유리감이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무대와 공간은 숨 막힐 만큼 압도적이어서, 관객이 삶의 호흡과 숨결을 생생하게 전달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관객이 관객으로서 수용적 주체가 아니라 무대의 환상적인 기술을 찬양하는 수동적 찬양자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죠. 이러한 관객의 전락은 경계가 더욱 단단해졌음을 뜻하며, 이는 주체적 수용자로 인식되는 포스트모던 관객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현상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연극의 과제 중 하나는 보이지는 않지만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어떻게 하면 허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연출가들은 경계 완화를 위해 안락한 객석을 폐쇄하고 무대 공간 자체를 분리시켜 객석으로 활용한다든가, 아예 공연장을 야외로 안내하는 등 경계 허물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관객을 수동적 참여자가 아닌 적극적인 동참자로 만들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직접 무대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파격적인 공연도 있습니다. 이처럼 참여적 관객을 지향하는 것은 한마디로 경계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연극적 형식으로 경계를 파괴하는 현상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과거 동서양에서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펼쳐졌던 광대놀이, 소극(farce), 장터연극, 코메디아 델라르테(comedia dell’arte), 남사당패 등은 경계가 불분명하며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연극의 유형이었습니다. 예술의 개념이 돌고 도는 것이고 과거가 새롭게 수렴되는 반복 재생적 형태가 그 특징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경계의 측면에서, 특히 관객의 수용적 측면에서 연극의 경계는 분명히 과거 회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결국 현대 연출가의 숙제는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와는 새로운, 즉 시간과 공간적으로 경계가 있으되 경계가 없는 연극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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