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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2)

공연·전시

by tardi 2025. 8. 1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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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영화의 경계: 기술, 자본, 그리고 예술의 본질을 묻다

현대 연극은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즉흥성을 강조하고, 집단 창작을 활발히 하며, 현전과 비실존적인 이미지를 혼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단 내 개인 사이의 경계가 중요하게 부각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 간의 크로스오버 현상 속에서도 경계는 두드러집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대 위에서 추구되는 실제와 이미지의 문제는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합니다. 과거 연극사에서도 그림자극, 가면극, 인형극처럼 육체의 현전보다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형태가 있었는데, 현대 연극은 여기에 카메라와 스크린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새로운 이미지 연극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이 지점에서 제7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화는 기존 예술과는 큰 차별성을 보입니다. 다른 예술들이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에 반해, 영화는 자본과 기술이 결합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하며 영화의 탄생을 알린 그날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유료 관객' 앞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입니다. 유료 관객의 존재는 영화가 탄생부터 자본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초창기에는 연극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연기와 연출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초기 영화는 연극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연극영화학과'라는 명칭으로 연극과 영화를 함께 묶어 교육하는 것도 이러한 개념 체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연극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한때는 상당히 혼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카메라(기계) 앞에서의 연기와 관객(사람) 앞에서의 연기는 심리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존재이므로, 연기자는 카메라의 시선과 실제 관객의 시선 사이에서 엄청난 심리적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CG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영화의 연기는 점차 현실(리얼)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 역을 맡았던 배우가 허공을 상대로 CG 연기를 하면서 외로워 울었다는 고백은 앞으로 영화 연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예측하게 해 줍니다. 반면 연극에는 NG가 없습니다. 일단 막이 오르면 배우의 모든 행동이 연기가 되는 연극의 연기는 영화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요즘에야 카메라 연기와 무대 연기를 구분하고 있지만, 이들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설정하느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가 연극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본을 등에 업은 영화가 확실하게 자기 영역을 구축하면서 점차 연극과 거리를 두게 되었지요. 아니, 연극과 멀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세가 역전되어 연극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요즘 영화 관계자들이 좋은 시나리오 작가나 배우들을 물색하기 위해 대학로를 기웃거리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연극판에서 성장한 희곡 작가나 연기자들 또한 금전적인 이유로 돈벌이가 좋은 TV 드라마나 영화 쪽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죠. 그러다 보니 어느덧 대학로가 영화 분야의 작가나 배우의 공급처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줍니다.

장르적 성격을 살펴보면, 연극은 태생적으로 영화와 상업적인 경쟁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입장료 차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연극은 영화보다 훨씬 비쌉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때 들어가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데 비해, 연극의 제작 비용은 상대적으로 소액입니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한 편이면 수십 편의 연극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유명한 배우 한 사람의 개런티만 해도 상당량의 연극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인데도 연극이 비싼 이유는, 영화가 '디지털 예술'이라면 연극은 '아날로그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자동 기계의 대량생산 시스템이라면 연극은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수공업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영화 한 편의 제작비는 연극 한 편의 제작비와 비교할 수 없지만, 일단 필름으로 완성된 영화는 스크린과 영사기만 있다면 전 세계 어디서든 동시 상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연극은 지방 순회공연조차 만만치 않습니다. 스태프와 캐스트 전체, 모든 무대 장치를 들고 이동해야 하는 연극은 이동 비용만 해도 엄청나죠. 결국 일회성 공연 비용에서 두 예술 간에는 큰 차이가 있고, 수지 타산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극은 입장료가 비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연극사를 살펴보면 연극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연극은 늘 곤궁하다는 정평이 나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죠. 고대 그리스 연극은 국가가 지원한 범국민적 행사였으며, 로마 시대 연극은 후원자가 없었다면 공연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극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지원이 없다면 과연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연극의 뿌리에 생명수를 주기 위한 지원 제도는 마치 칼과 같습니다. 칼이 부엌에 있을 때는 유용하지만 강도의 손에 쥐어져 있을 때는 위험천만한 물건이 되는 것처럼, 연극에 대한 지원이 연극인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킬 수도 있겠지만, 자칫 기생 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가 천만 관객을 운운하는 이 시대에 연극은 고작 백 석 규모의 소극장이 만석으로 채워지면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흥분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시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연극과 영화가 '게임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언론 매체에 있습니다. 언론은 연극보다 영화를 선호합니다. TV나 신문, 인터넷 등에는 영화에 대한 기사가 넘쳐나지만, 상대적으로 연극에 대한 기사는 드뭅니다. 언론 매체를 통해 실시간 소식을 전해 듣는 대중은 영화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영화의 장르, 감독, 출연 배우들, 그리고 상영 시간을 사전에 모두 알고 있지요. 극장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접근성에서도 연극 공연장은 영화에 비해 훨씬 열악합니다. 공연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고, 공연장도 부족하다 보니 연극을 관람하려면 멀리 가야 하고, 어떤 공연이 자기에게 맞는 공연인지 파악하기도 힘듭니다. 제목만 보고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소극장은 좌석도 비좁을 뿐 아니라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허리에 힘을 주고 한두 시간 이상을 버텨야 하는 공연장도 있으며, 한 번 들어가면 공연이 재미없어도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니 선택을 잘못하면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입장료, 정보 접근성, 안락함, 대중 친화력에서 연극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물론 이를 무조건 언론 매체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언론은 대중이 선호하는 것을 다루는 속성이 있다 보니 연극보다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 영화는 상업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에, 연극의 상업적 독립은 더욱 요원해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연극은 오랫동안 '예술적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대중적이어야 하느냐'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왔습니다. 대중성은 곧 상업성을 의미하는 만큼, 예술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연극이란 왠지 폄하하는 의미로 들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와 요구로 인해 이들 경계가 허물어지고 '예술적인 것이 곧 대중적인 것'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애초에 원시 연극은 대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극은 태생적으로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이었습니다. 이는 종교적 축제로부터 파생된 연극의 기원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 축제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만인을 위한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계급도 없고 인위적인 질서도 흐트러진 상태에서 모든 참여자는 인위적이고 사회적인 질서가 아닌 자연적인 질서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연극이 발전하고 사회적 시스템과 연합하게 되면서 비극이라는 장르가 생겨났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복잡한 플롯으로 엮인 비극이야말로 위대한 극작품으로 칭송되었습니다. 비극은 하층민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오로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연극이었으니, 연극으로서는 참으로 비극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극'이라는 그럴듯한 장르에 밀려 애초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광란의 축제를 벌였던 연극적인 놀이는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골목이나 시장 바닥에서 그저 웃기는 놀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소극, 장터 연극 같은 코미디는 경박한 것으로 무시되었고, 오로지 비극만이 품위가 있는 것으로 칭송받았습니다. 고급스러운 연극은 민중의 것에서 분리되어 상류층의 것으로 넘어갔고, 민중에게 남은 것은 저잣거리에서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광대놀이뿐이었습니다. '연극'하면 왠지 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극의 영향이고, 배우를 '딴따라'로 폄하한 것은 희극의 영향입니다. 뭔가 '있는 사람들'이 향유하는 예술이 연극이라는 생각이 깊이 스며있는 것은 비극 때문이고, 지저분하고 막일꾼의 느낌이 나는 것은 희극 때문이라는 것이죠. 현대에 들어와 연극의 문턱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비극의 영향은 여전히 막강해서 장충동 국립극장의 위압적이고 웅장한 건물 형태를 보면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날 정도입니다. 마치 공연장에 들어갈 때 정장을 해야 할 것 같은 엄숙함이 묻어 나오는 것이죠.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민중적인 것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하찮게 여겨지던 서민들의 놀이적 연극이 재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소극이나 탈춤, 마당극이 중요한 연극 장르로 인정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현대의 실험적 연극은 잠재적 관객인 시민들이 연극에 관심을 갖지 않고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인식 하에, 관객을 찾아 서비스를 제공하며 그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려 노력합니다. 이를테면 '특정 공간(Site specific)' 연극은 배우들이 길거리로 나와 일상의 시민들과 동행하거나, 명동 한복판에서 공연을 하거나, 종로 거리에서 바쁘게 걷고 있는 시민들과 함께 공연을 펼치며 경계를 허물고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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