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가 시작된 보스턴 근교의 작은 마을, 세일럼에 살던 정직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이웃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그였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집에서 일하던 처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계명이 곧 법인 엄격한 청교도 마을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었죠.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아내뿐이었지만, 그는 깊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한편, 그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던 처녀는 집에서 쫓겨난 후에도 남자를 잊지 못하고 그의 아내 자리를 탐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일이 불씨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마을 전체를 집어삼키는 광기로 번집니다. 십자가를 흔들어대며 시작된 마을 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남자는 꼼짝없이 덫에 걸리고 맙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질투와 욕망이 뒤얽힌 교묘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남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로 그동안 쌓아온 모든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놓입니다. 처녀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정하고, 남자는 사실이라고 맞섭니다. 재판관은 그의 아내를 불러 진실을 묻습니다. 거짓말을 모르는 정직한 아내는 망설입니다. 남편이 부정하지 않았다고 증언하면 처녀의 거짓이 진실이 되어 자신과 남편이 위험해지고, 남편이 죄를 인정했다고 말하면 남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상황.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아내는 결국 남편의 명예를 택하고 위증을 합니다. 명예를 위해 거짓말을 선택한 아내의 행동은, 프랑스 고전주의 극작가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Le Cid)'에서 사랑과 명예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주인공들의 비극적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운명의 함정에 빠진 남자는 마을 목사에게 밉보여 악마와 내통한 자로 몰립니다.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자백하라는 강요에, 영웅도 순교자도 아닌 그는 살고 싶다는 절박함에 자백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그에게 또 다른 협박을 합니다. 악마와 내통한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백을 넘어 양심을 팔고 인간성을 내던지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결국 남자는 서명했던 자백 증명서를 찢어 버리고 "하나님은 죽었다!"고 절규합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더니 이제 와서 동료의 이름을 팔아 자유를 얻으라고 협박하는 상황. 이는 1950년대 초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의 광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당시 반미 활동위원회는 할리우드를 겨냥했고, 아서 밀러와 절친한 친구였던 감독 엘리아 카잔은 동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로 인해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맞서 밀러는 카잔의 청문회 이후, 17세기 세일럼의 마녀사냥 기록을 토대로 1952년 희곡 '시련(The Crucible)'을 발표합니다. 작품을 통해 자신을 말하는 작가다운 행동이었죠. 모든 것이 위선이고 정직함이 사라졌다고 절규하는 작품 속 남자 주인공 프록터는, 집단 광기에 항거한 밀러 자신의 분신이자 대변인이었습니다. 실제로 밀러 역시 청문회에 불려가 동료의 이름을 대라고 협박당했었습니다.

아서 밀러의 작품 '시련'은 많은 영화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사르트르가 영화화했고, 44년이 지난 1997년에야 니콜라스 하이트너 감독에 의해 할리우드에서 개봉될 수 있었습니다. 하이트너 감독의 영화는 원작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영상미 대신 인물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춰 연극적인 색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법정에서 판결하는 장면을 장시간 부각하여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흑백 대비가 뚜렷한 의상(검은색 옷과 흰색 모자)은 선과 악, 찬성과 반대 등 명확한 이분법적 논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동시성과 연속성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연극은 닫힌 공간에서 숨 막힐 듯한 밀도로 인간 욕망의 속성을 그려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대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불꽃 튀는 심리적 갈등이 단순히 대사가 아닌 신체 언어로 표현되어야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뮤지컬 '명성왕후'를 연출했던 윤호진 연출가가 연극으로 돌아오면서 선택한 작품이 바로 '시련'입니다. 이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첫째, 1979년 '시련'을 무대에 올리려다 10.26 사태로 강제 중단되었던 아픈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의 정치적 상황은 집단의 비합리적인 힘에 의해 개인이 희생되던 세일럼 마을이나 1950년대 미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번 무대에서 주목할 점은, 윤호진 연출가가 강조했듯이, 인간의 아집과 편견이 빚어낸 마녀사냥의 분위기 속에서 개인 대 개인의 심리적 갈등이 얼마나 극적으로 표출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품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 화려한 기술 대신 배우의 연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연출 방식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집단 광기의 거대한 힘, 그에 짓눌려 희생되는 개인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얄팍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의 관계 등 권력과 인간성의 문제를 다루는 '시련' 같은 작품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화려한 뮤지컬 무대에서 빈 몸으로 돌아온 연출가의 새로운 시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가 됩니다.
원작의 제목인 'Crucible'은 '도가니'와 '가혹한 시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국내 개봉 영화는 '크루서블'이라는 원제를 사용했지만, 이번 연극에서는 후자의 의미인 '시련'을 택했습니다. 집단 최면의 무서움을 강조하고, 편견과 아집으로 자기 최면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면 '도가니'라는 제목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배경에는 집단 광기보다는 신념과 용기를 지닌 개인이 겪어야 할 시련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개인의 죄와 희생, 용서, 그리고 신념과 명예에 관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연극의 미덕을 기대하게 됩니다.
'시련'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양심과 용기가 언제 어디서든 중요한 가치이며, 집단 히스테리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반테러 공격에 반대했던 밀러는, 자신이 경험했던 악몽 같은 사건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자행되는 악성 댓글처럼, 자신을 숨긴 채 한 개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마녀사냥은 형태만 변했을 뿐 본질은 그대로인 인간의 어두운 속성을 보여줍니다.
집단 히스테리의 무서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서 밀러의 '시련'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닌, 지금 여기, 바로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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