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노랗게 빛바랜 낡은 팸플릿을 뒤적일 일이 생겼다. 2004년 1월부터 시작된 연극 페스티벌 ‘연극 열전’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예술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은 15편의 작품을 엄선해 선보이는 이 행사는, 20년 전 극장가를 전전했던 관객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을 되짚어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화려한 페스티벌의 첫 테이프를 끊은 작품이 바로 ‘한씨 연대기’(김석만 연)였다.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뜨겁게 살아온 관객들에게 빛바랜 사진첩을 넘기는 듯한 묘한 그리움과 설렘을 선사했다.
개인적으로 신촌 굴다리 곁에 있던 조그만 소극장 연우무대에서 처음 접했던 ‘한씨 연대기’는 지극히 생경하고도 충격적인 무대였다. 연출가의 콘셉트도 배우들의 연기도 관객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할 만큼 신선하고 놀라웠다. 20여 년이나 묵은 먼지를 털고 찾아낸 팸플릿에는 제22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한국일보 선정 '85년 연극 베스트' 공동 1위, 한국연극지 선정 '85년 연극 베스트' 공동 1위, 제2회 오영진 연극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이 빼곡했다. 1986년 백상예술대상은 신인연출가상(김석만)과 신인연기자상(문성근) 모두를 ‘한씨 연대기’에 안겼다. 당시 연출가 김석만뿐 아니라 출연 배우였던 문성근, 양희경, 박용수, 오인두, 김미경 등은 현재 연극, 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견 배우들이다. 이렇듯 당대 내로라하는 상들을 휩쓸었음에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낄 만큼, ‘한씨 연대기’는 80년대 젊은이들의 날 선 함성을 담아낸 연극이었다.

이 작품은 황석영의 중편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연극이 원작을 효과적으로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서사극 양식의 공이 크다. 연출가 자신도 브레히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무대를 바라보게 한다. 즉, 관객은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동시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무대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해방 직후부터 1972년까지의 시간 흐름과 온갖 장면들을 톱니바퀴처럼 엮어낸다. 독립적이면서도 비약적인 각 장면들은 서로 동등하고 균형 있게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사건이 자체적으로 완결되기 때문에, 특정 장이 생략되어도 전체 구성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극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해설하기 위해 자막, 환등, 노래 등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이 작품 역시 차트, 조명, 해설, 노래를 통해 무대가 수시로 바뀌는데, 이 때문에 상징적인 무대는 필수적이다. 특히 시대적 상황을 직접 전달하는 차트는 문자와 무대의 기막힌 조합으로, 관객은 시공간의 변화뿐만 아니라 무대 설명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상황까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연극은 공간의 제약이 있다고들 하지만, ‘한씨 연대기’의 무대는 관객과의 암묵적인 약속(컨벤션)을 통해 상상력과 어우러져 어떤 곳이든 표현해 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배역이 바뀌는 장면이나 차트를 넘기는 장면이 관객에게 숨김없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화효과'를 위한 연출의 의도적인 행위다. 눈앞에서 목격되는 인물들의 변신과 공간의 순간 이동은 관객이 생리적으로 무대에 동화되려는 경향을 막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작품을 관찰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차가운 머리’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서사극은 관객에게 교훈을 주고 사회체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한영덕이라는 개인의 삶이 내포했던 시대적 의미’에 대해 강한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공연의 미덕은 개인과 사회체제 사이의 힘겨루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이데올로기에 찌들어 있는가, 개인이 집단의 폭력에 나약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며 사회체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차가운 머리’가 냉철한 사고에 요구될 때, ‘따뜻한 마음’은 무엇에 필요할까. 이에 대한 답은 ‘한씨 연대기’의 감동 유효기간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하다고 판단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집단의 광적인 폐해를 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영덕이라는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숭고한 휴머니즘에 있다.
종국에 헌신짝처럼 일그러지는 한 개인의 삶은 보잘것없고 힘없는 개미와 같은 존재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듯한 형상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 속에는 인간적인 고집과 삶의 주제 의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의사로서의 자부심으로 강압적인 명령보다는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고자 했고, 자신의 목숨보다 환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집념에 가까운 휴머니스트로서의 모습은 친구 서학준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사회에서 추방되고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사라진 한영덕의 비극적인 삶이 여전히 기억되는 까닭은, 그가 거대한 풍랑을 견디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린 아름답고 고집스러운 작은 배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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