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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 리뷰

공연·전시

by tardi 2025. 9. 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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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선정작 연극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 (8.22~8.31)가 성수아트홀에서 공연되었다. 우리는 8월 30일 4시 공연을 관람하였다. 성수아트홀에 들어가니 마치 서점처럼 책들이 진열되어 있고 누구나 와서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카페도 있어 문화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서 공연된 연극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는 극단 성북동 비둘기에서 제작했고 김현탁이 연출을 맡았다. 300여 석의 공연장이 아담하다.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라는 제목부터 재미있다. 제목은 이미 연출가 고유의 색채를 진하게 풍긴다. 연출이자 재창작자인 김현탁은 원작이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La casa de Bernarda Alba) 임을 애써 부각한다. 그러니까 스페인 발음이 한국어로 둔갑하면서 베르나르다가 ‘배로나르다’가 되고 인물 알바는 요즘 흔히 쓰는 알바(아르바이트)가 되었다. 알바는 노동을 뜻하는 아르바이트(비정규직 노동)의 독일어에서 온 것 아닌가? 알바의 의미가 치환된 것은 필히 노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안내서에는 이 작품이 “오늘날 한국의 비정규직 현실을 조명하되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고자 한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배우는 끊임없이 노동의 장면들을 수행하며 알바에서 알바로, 또 다른 알바로 이어지는 일상을 몸으로 살아낸다”라고 적혀 있다.

베르나르다에서 생겨난 ‘배로나르다’도 재미있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배로나르다’는 원작에 대한 배려와 함께 다의의 의미를 뿜어낸다. 배는 타는 배도 될 수 있고, 두 배 세 배의 배도 될 수 있다. 즉 ‘배를 타고 짐을 운반하다’로 읽을 수도 있고 ‘몇 배의 짐을 짊어지고 나르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말 그대로 ‘알바의 집을 배로 실어 나르다’로 읽어도 무방하다. 이런 의미들은 원작이 지닌 사회의 억압적인 배경을 그대로 살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 현실’ 혹은 ‘억압받는 여성’과 연결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목의 언어유희를 보면, 원작의 내용이 갖고 있는 강압적인 어머니 베르나르다 알바와 다섯 딸이 겪는 억압과 비극의 문제를 노동의 문제, 특히 여성 노동의 문제 나아가 여성의 문제를 터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을 읽을 수 있다고?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베르나르다 알바 역시 여성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집 안의 어른인 그녀가 다섯 딸을 통제하는 모습은 단순히 여성 간의 문제라고 보기보다는 알바가 강조하는 가문의 명예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적 사회가 만든 여성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아닌가. 결국 원작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여성에 대한 억압이며, 이번 공연 역시 억압받는 여성과 연결할 수 있다. 더구나 무대에서 강조한 웅녀의 단군신화와 심청이의 희생에 초점을 둔다면 이 점이 더욱 도드라진다.

원작의 줄거리

로르카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작가의 유명한 희곡 중 하나다. 1936년에 쓰였지만 발표 후 스페인 내전 발발과 작가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에 한참 뒤인 1945년에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초연될 수 있었다. 배경은 20세기 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이다.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골 마을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강력한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후 다섯 딸을 모아놓고, 8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금하고 집 안에서만 지낼 것을 선언한다. 이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한 알바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다. 집 안은 감옥처럼 변하고 딸들의 삶은 억압과 고립 속에 놓이게 된다.

알바의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는 전 남편의 소생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마을의 젊고 잘생긴 남자 페페 로마노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페페는 앙구스티아스의 재산을 노리는 것이었고, 동시에 막내딸 아델라를 포함한 다른 자매들과도 묘한 관계를 맺으며 복잡한 애정 관계를 형성한다. 집 안에 갇힌 다섯 자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과 좌절을 겪는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막내딸 아델라는 자유에 대한 강한 열망과 페페에 대한 금지된 사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그녀는 페페와 은밀히 만나지만 이를 넷째딸 마르티리오가 눈치채고 아델라를 질투한다. 다른 자매들 또한 페페를 갈망하거나 서로를 감시하며 질투와 불신으로 가득 찬다. 이런 가운데 장녀 앙구스티아스는 페페와의 결혼을 꿈꾸며 행복해한다. 질투심에 눈이 먼 마르티리오는 아델라와 페페의 밀회를 알바에게 고해바친다. 격분한 알바는 총을 들고 페페를 향해 총을 발사하고 페페는 도망친다. 알바는 딸들에게 페페가 죽었다고 거짓말한다. 페페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아델라는 절망감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아델라의 시신을 발견한 알바는 마지막 순간까지 명예에 집착하며 “그녀가 처녀로 죽었다”고 외치며 자살한 사실을 숨기려 한다. 다른 딸들에게도 이 비극을 비밀로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집안의 명예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끝까지 통제를 시도한다. 이렇듯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과 욕망, 질투가 어떻게 한 집안이 비극을 넘어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 내면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명예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파괴되는 인간성을 고발한 걸작이다.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 줄거리

자 그렇다면 원작과 이번 공연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은 언어유희 빼고는 줄거리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다만 원작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억압과 통제’가 현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베르나르다 알바 가문의 현실로 치환되었다. 원작의 엄격한 상중 생활이 강요되는 알바의 집은, 이번 공연에서 각종 알바 현장으로 바뀐다. 요식업 주방, 택배 배송 현장, 의류 판매점 등 현대 한국 청년들이 마주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 공간이 무대에서 펼쳐진다.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청년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을 넘어, 알바에서 알바로 이어지는 무한한 노동의 굴레 속에 갇혀 산다. 원작의 장례식 장면 또한 이러한 동시대의 다양한 알바 공간들로 재해석된다. 청년들은 잠시 쉬거나 꿈꿀 여유도 없이 노동의 현장에 내몰린다. 알바의 집은 이들에게 안식처가 아닌, 삶을 옥죄는 감옥이 된다. 노동으로 내몰려 꿈마저 꿀 수 없는 억압된 현실을 반영한다.

이 공연에는 각종 알바 현장에서 많은 일을 했던 한 인물이 과로사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적인 장면이 있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뉴스가 이따금 보도되는 현실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노동자의 죽음 이후에도 노동은 이어진다. 삶의 끝에서도 노동의 장소는 바뀌고 또 바뀌는 ‘알바 집의 무한 굴레’가 제시된다. 연극은 일에 파묻혀 고단한 청년들의 일상을 통해 관객에게 노동의 의미와 인간 존엄의 가치를 다시금 묻는다. 과로사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 현실과 그 속에서 희생되는 개인들의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깊은 메시지를 던진다.

이렇듯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는 고전의 메시지를 빌려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청년 세대의 자화상을 그려내며 그들이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울러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곰과 호랑이 탈을 쓰고 전하는 단군신화,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심청이가 인당수의 거센 파도 속에 뛰어들기를 통해 페미니즘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인간이 되기 위해 조건적인 희생을 감내한다. 자연 상태의 짐승이 환웅이라는 남성 권위의 상징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존재로 인정받고 사회에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안내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전단 배부 알바를 하던 곰탱이와 호돌이는 어느 날 하늘나라의 환웅이 인간세계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한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품고 있던 두 친구는 환웅을 찾아가고, 환웅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방에서 백일 간 피자와 콜라만 먹고 버틴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생각보다 혹독한 인간의 조건에 호돌이는 중도에 포기하고, 홀로 남은 곰탱이는 피자가게와 택배 배송, 청소와 옷 가게 등 여러 알바를 전전하며 인간세계의 험난한 현실을 마주한다.” 동굴이 지하방으로, 쑥과 마늘이 피자와 콜라로 바뀐 것은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암튼 알바에 지칠 대로 지친 곰탱이가 여성인 것은 눈여겨봐야 한다. 심청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효라는 사회적 가치로 생겨난 극단적 희생자다. 눈먼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도록 인신 공양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가장 숭고한 덕목으로 여겨지던 효가 여성에게 목숨까지 내놓으라는 선까지 강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청의 서사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 정절이나 효를 철저하게 요구하는 열녀 설화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웅녀와 심청은 개인적 욕망이나 주체적인 선택보다는, 외부에서 부여된 역할이나 조건을 수행하는 존재다. 두 여성의 희생은 각각 민족의 탄생이라는 거대하고 숭고한 목표, 또는 효라는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를 완성하는 데 사용되며, 그 과정에서 개인으로서 여성의 고통은 간과되거나 오히려 미화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가 젊은이들의 고된 노동의 한쪽에 여성의 희생 서사가 분명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공연 포스터는 아이러니하다. 발판 위에 선 여성 다이버가 푸른 물을 향해 뛸 준비를 마쳤다. 포스터 상변에 위치한 원피스 수영복 차림의 다이버는 두 팔을 수평으로 펼친 긴장된 몸짓이다. 이제 최선을 다해 뛰어내림으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버에게 뛰어내림은 자의지 억압이나 폭력은 아니다. 하지만 심청의 뛰어내림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솜씨를 겨루는 다이빙과 죽음을 위해 뛰어드는 점프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의 다이빙 이미지는 또 하나의 이미지 유희라고 할 것이다.

연출가 김현탁

연출 김현탁은 자기 고유의 예술 미학을 시도하면서 연극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실험 무대에 관심이 많은 연출가는 ‘가난한 연극’을 주창한 그로토프스키와 유사한 예술적 지향점을 공유하지만, 한편으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통해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는 로르카의 작품을 그렇게 했듯이, 희곡과 소설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작품들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새롭게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무대에서 배우들은 쉼 없이 움직이며 신체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간의 공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2012년 에우리피데스의 고전 비극 <메디아>를 원작으로 한 <메디아 온 미디어>를 공연하였다. 2013년 <열녀춘향>, 2014년 <헤다 가블러>, 2015년 <망루의 햄릿>, 장 주네의 <하녀들>을 재해석한 <하녀들>이 있다. 2023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 창출을 위한 연출과 연기술 연구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심으로>를 연출하였다. 브레히트의 이론을 탐구하며 코로나 시대의 연극에 대한 시선을 담은 프로젝트성 공연이다. 2024년 <윌리로먼 비긴즈>는 1920년대 쉐보레 차량을 활용한 놀이 형식의 무대를 만들었다. 이렇듯 그가 공연한 목록의 제목만 보아도 그의 작품 미학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연극 무대와 미학

공연 시작에 앞서 관객 앞에 펼쳐진 것은 빈 무대뿐이다. 눈길을 끄는 것이 있긴 하다. 하나는 안쪽에 조촐하게 펼쳐져 있는 스크린이다. 또 하나는 무대 아래에서 입장하는 관객과 교감하는 곰 탈을 쓴 연기자다. 곰은 관객과 악수도 하고 손을 흔들며 아는 체한다. 살짝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중에 곰탱이가 되어 열연을 펼친다.

시작 또한 재미있다. 지금은 사라진 20세기 폭스 오프닝이 힘차게 울려 퍼진다. 지금 우리가 공연장에 온 거 맞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온 것 같다. 이어 스크린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여 단군신화의 내용을 전한다. 모두 검은색 의상을 착용한 배우들은 시종여일 신체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빈 무대에 유일하게 바퀴 달린 운반대인지 뭔지를 활용하여 환웅의 소파가 되기도 하고 심청이 탄 배가 되기도 한다. 모두가 검은색 의상을 입어 뚜렷한 구분이 없는 배우들은 뭐든 될 수 있는 변신의 요소가 풍부하다. 12명의 배우가 소리와 신체의 움직임으로 다양한 물건과 인물이 되어 줄거리를 엮어 간다.

일반 연극에서 흔히 만나는 일목요연한 전개는 찾을 수 없으므로 이를 기대했다가는 실망이 클 것이다. 급진적인 전개와 끊임없이 변하는 공간에서 매 장면은 강렬하고 독특하다. 배우의 신체, 음향, 조명, 의상 등으로 엮인 무대 언어는 꿈마저 꿀 수 없는 한국 젊은이의 비정규직 현실 조명하면서, 한편으론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역동성이 존재한다. 이렇듯 김현탁의 실험 연극에서 중심 주제를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관극의 가치는 충분하다. 김현탁의 무대를 만나고 싶다면 <알바의 집, 배로나르다>는 적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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