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씨 에푸이(Kossi Efoui)
아프리카 하면 우리는 사막이나 정글 숲 혹은 적도의 고온다습한 기후나 약육강식의 동물들이 세렝게티의 초원에서 뛰놀고 움막집에서 생활하는 벌거벗은 흑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몽골 사람을 만나면 아직도 말을 타고 다니는 줄 아는 것과 흡사하니, 거꾸로 외국인들이 한국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지나치게 우리의 주관적인 시선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게릴라 극장에서 ‘아프리카 희곡 읽기’(2008)라는 주제로 낭독공연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새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두 가지로, 하나는 아프리카 연극이라는 점이며 또 하나는 낭독공연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언제 아프리카 연극을 만난 적이 있던가. TV에서 아프리카의 마을 사람이 모여 축제를 즐기며 노래하고 춤을 추거나 성인식의 장면들을 가끔 봐 왔지만, 이런 것을 연극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우리의 지식으로는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유명한 나이지리아의 웰레 소잉카의 연극 정도는 들은 바 있으며, 2001년 국립극장에서 아프리카 연극 페스티벌에서 세 작품 정도 공연된 기록을 찾을 정도다. 아프리카 연극 페스티벌에서 소개된 작품은 소잉카의 <길>, 리차드 리브의 <노예처럼>, 보니 사이먼의 <일어나라 알버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프리카의 연극은 가능성의 연극, 새로운 연극을 위한 대안의 연극이라는 점이다. 일찍이 피터 브룩이나 아리안 므누슈킨 등의 연출가들이 서양 연극의 한계를 절감하고 연극과 인류 근원의 연관성에 접근하면서 아프리카 연극에 주목하였듯이 제의식, 축제, 전통 의례 등 삶 자체가 풍성한 연극적 요소인 아프리카 연극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연극의 보물 창고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낭독공연이라는 것인데, 과연 낭독공연이 연극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 무대공연에 비해 훨씬 가볍고 경쾌한 낭독공연은 사실은 예술가들에게 피를 말리는 작업에 속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접근한 연기자나 연출가는 종종 혼쭐이 나기도 한다.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낭독공연은 세계 곳곳의 연극을 재빠르게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매력적인데 바로 이 점에서 극작가들은 낭독공연에 주목한다. 즉 새로운 문화권의 연극이 현재 어떠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 작가에게 소재나 양식의 측면에서 배움의 터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희곡 낭독공연에는 총 5개국 5 작가의 66 작품이 소개되었다. 그중 내가 번역한 작품은 토고의 극작가 코씨 에푸이(Kossi Efoui)의 비극 <이오>(송선호 연출)다. 작가는 <이오>가 비극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그러나 작품을 면밀히 살펴보면 비록 고통받는 아프리카의 현실이 비극이라 하더라도 희망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비극이라고 하기에는 의구심이 든다. 아마도 그리스 비극을 자기 작품의 원류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작가는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조그만 나라 토고 출신이지만 대학생 때 학생 운동에 가담했다가 추방되어 현재는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지식과 사상을 충분히 흡입한 탓에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서양적인 요소를 작품에 삽입한 것은 낯선 것이 아니다. 관점에 따라 상당히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이오>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한 이민자의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작가를 선택할 때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활동적인 작가, 수상 경력이 화려한 작가를 주목하면서 출신 국가나 작품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중 우리의 가시권에 들어온 작가가 에푸이다. 그는 이미 프랑스에서 연중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연극경연대회에서 <교차로>(1989)라는 작품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좀 더 최신작이며 시적 운율로 쓰인 <이오>(Io, 2006)는 다층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어 도전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으로 이 작품을 공연하기로 하였다.
극작품뿐 아니라 소설도 쓰는 에푸이는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종종 탈식민주의, 정체성, 기억, 망명, 권력의 폭력성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시적이고 실험적인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오>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이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극이다. 제우스에 의해 사랑받고 헤라에 의해 쫓기며 소가 되어 떠돌게 되는 이오 신화를 바탕으로, 작가는 망명자 혹은 경계인의 존재를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이오>와의 만남은 대체로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유명사들, 생소한 단어들은 작품 이해에 엄청난 장애물이었고 번역에 있어 중요한 맥락 파악을 가로막았다. 번역본을 들고 연출가와 배우들과 처음으로 만났던 순간, 모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막막함을 억누르고 우리는 등장인물들부터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에는 안나, 후치쿠치맨, 어머니의 아들, 마스타 블라스타라고 명명된 네 명의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제목의 이름인 이오를 거론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이오는 누구인가? 이오는 그리스 신화에서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신화 속 인물이다. 제우스에 의해 눈도장이 찍힌 림프 이오는 구름에 가려진 채 제우스에 의해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다. 헤라가 이를 눈치채자, 제우스는 이오를 암소로 변하게 하지만 헤라는 암소를 달라고 조른다. 이리하여 암소가 된 이오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방랑하게 되고, 프로메테우스를 만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듣기도 한다. 암소가 건넌 바다는 이오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해라고 부르게 된다. 마침내 이집트에 도착한 이오는 그곳에서 제우스를 다시 만나 인간의 모습을 되찾고, 그와 동침하여 아들 에파포스를 낳는다. 그 후 이오는 이집트 왕 텔레고노스와 결혼하였으며 죽은 다음에는 이집트 최고의 여신인 이시스가 되어 추앙받고, 그의 아들 에파포스 역시 이집트에서 숭배받는 황소 아피스와 동일시된다.

이러한 내용의 이오는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 잠시 등장하는데, 에푸이는 이오가 방랑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성폭행을 당해 본의 아니게 임신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정신적·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어린 소녀들을 대입시킨다. 그러니까 이오의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안나는 이오의 현대적인 인물인 셈이다. 어머니의 아들은 어린 소녀들이 낳은 아이를 대변한다. 한참 인형을 갖고 놀 나이에 총을 든 아프리카의 소년들이 바로 어머니의 아들인 것이다. 이렇듯 극 중 이야기는 신화와 현실이 중첩되어 있다. 현실은 하나의 무대처럼 간주되어 극중극이 되기도 하고, 성서 이야기와 아프리카의 혼이 담겨 있는 레게나 블루스 음악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초능력을 지닌 인간을 의미하며,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을 띠기도 한 마스타 블라스타는 “사제들에게 15년 동안 교육을 받아 라틴 역사와 그리스에 정통한 인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극중극의 그랜드 로열 극단의 배우로서 그는 약삭빠른 처신을 하는 속세인으로 대중 작가, 모방 작가, 인용의 밀매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아프리카의 지식인 가운데 능한 처세로 권력에 붙어 있는 사람일 수 있으며 머나먼 타향에서 조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일 수 있다. 후치쿠치맨은 딕슨(Willie Dixon)이 작곡하여 블루스의 고전으로 꼽히는 <아임 유어 후치 쿠치 맨>(I'm Your Hoochie Coochie Man)의 제목을 장식하는 인물이다. 후치쿠치맨은 “제우스 사원에서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의 비밀을 지키는 경비”이면서 극중극 혹은 인간 세상에서는 “종려나무의 수액과 순수 생강 눈물과 블루스 노래의 영혼이 섞여 있는 선술집” 주인이기도 하다.
<이오>의 공간은 아프리카의 어느 시장 거리이다. 그곳에는 인체의 특정 부위가 왜곡되거나 강조된 아프리카 특유의 조각상을 팔거나 아이들이 떼 지어 노는 곳이기도 하다. 무대는 세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안나의 공간으로 미용실이며, 다른 하나는 마스타 블리스타의 대필인 공간이며, 후치쿠치맨의 술집이다. 어머니의 아들은 따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네 명의 인물들이 아프리카의 운문적 대사를 읊으며 아프리카의 비극적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 이 작품은 2006년 파리 빌레트 극장에서 프랑수아즈 르프와의 연출로 초연되었고, 그해 10월 프랑스어권 페스티벌에 선정되어 리모주에서 공연되었다.
등장인물이 네 명이지만 낭독공연을 위해서는 다섯 명의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지문을 읽어주는 또 한 명의 배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섯 명의 배우가 벌인 <이오>는 관객의 시선으로 볼 때 맨 왼쪽에 후치쿠치맨, 안나, 어머니의 아들, 마스타 블라스타의 순으로 관객을 향해 옆으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지문을 위한 배우는 그들과 약간 떨어져 맨 오른쪽 약간 뒤쪽에 위치하였다. 이들의 위치 선정은 공연에 비해 크게 중요하다고 할 수 없으나 관객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사항이다. 이들의 의상은 평상복 차림이었으나 아프리카풍의 목걸이나 팔찌를 착용하는 식으로 약간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안나와 어머니의 아들 사이에 마치 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흰 천을 주절주절 매단 대나무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상황에 따라 배우들이 대나무를 어루만지자 흔들리는 대나무는 이오의 마리오네트를 연상시켰다. 또 배우들 뒤로 살만 남은 우산을 매달아 놓고 시인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걸어 놓았는데 이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시를 서비스하는 아가씨”의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시를 서비스하는 아가씨는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에스트로피 극단의 퍼포먼스의 독창적인 이념을 각색한 것”인데, 시 걸이에 시집을 걸어놓고 손님에게 원하는 시를 읊어 주는 것이다.
하기야 작가 에푸이는 다른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을 자기 작품에 차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최초의 희망>에서 “본질적인 것은 약속된 땅이 아니라 땅의 약속이다”를 인용하면서 아프리카 땅에서의 희망을 예언하고 있고, 과거의 시인들, “아이스킬로스, 조제 앙젤 발랑트, 장-피에르 아브라함, 아마두 구루마, 니체, 정신의 영역에 살고 있는 자들에 대한 존경”을 언급하기도 한다. 복잡한 인용들로 짜인 다층적 구조의 <이오>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작가의 다독에 기인하기도 한다. 연출가가 무대 한쪽에서 아프리카 전통 북을 설치해 놓고 직접 연주하였으며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미 핸드릭스의 <부두 차일>이 카세트를 통해 흘러나옴으로써 관객은 소리를 통해 아프리카의 리듬에 젖을 수 있었다.
에푸이는 신화의 인물 이오를 통해 다음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이오의 끊임없는 방황은 정치적 망명이나 강제 이주의 상황과 겹친다는 점이다. 또한 이오가 겪는 폭력은 여성의 몸이 어떻게 권력과 제도의 희생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작가는 인물의 이름이나 목소리가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과정을 통해 언어와 정체성의 해체를 보여주기도 한다.
낭독공연에서 배우들이 진땀을 흘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이유는 몸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며, 간단히 읽으면 될 것이라고 오판하기 때문이다. 준비가 되어 있는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공간 이것이 바로 낭독공연의 공간인 것이다. 거기에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얼어붙은 것 같은 육체는 평소에 길들여진 배우의 몸과 소리의 조화를 깨트리는 것이므로 배우는 상자 속에 갇힌 꼴이다.
낭독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목소리이다. 낭독으로 공연하는 것이니 오죽하랴. 오로지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들, 단어의 소리들이 만들어 내는 리듬과 운율 이것이 거의 낭독공연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훈련된 배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소리와 리듬의 하모니가 이루어져야만 훌륭한 낭독공연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배우의 소리를 최적의 상태로 끌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작품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품의 해석은 등장인물의 성격, 그들 간의 관계, 주제는 물론이고 단어 하나에도 의문이 생긴다면 해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기만의 목소리로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가로서 <이오>의 낭독공연에 참여하여 단어의 의미 찾기에 일익을 담당한 본인으로서 배우가 적절한 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제대로 의미 파악을 하였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오히려 연출가와 배우들이 문맥을 따라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소리를 낼 수 없는 단어들을 미로 찾듯 찾아 헤매면서 번역자도 해결 못한 문제들을 해결하곤 했다. 확실히 해석이란 워낙 다양해서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넓은 공간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아무것도 수용하지 않으려는 닫힌 형상을 지니고 있다.
모두에게 쉽지 않았던 <이오>의 낭독공연은 그만큼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명쾌한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점도 있지만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은 작품의 커다란 매력이다.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연구에 채찍을 가한 에푸이의 극작품은 특히 연극적인 측면에서 많은 연구 거리를 제공한 동시에 만만치 않은 아프리카 연극의 수준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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