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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회란기> 리뷰

공연·전시

by tardi 2025. 10.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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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란기>(번역 문성재, 각색/연출 고선웅,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2023.3.18. 18:00 )는 2022년 한국연극 베스트7에 선정된 연극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있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물음이 될 것이다. 몇 년 전에 정의에 대해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가 화제가 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의는 누구든 공평한 세상이라고 느낄 때 비로소 성립한다. 하지만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면, 보통은 한 사람이 공평하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법이다. 그러나 법 역시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거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 식의 자의적인 해석이 성행한다면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할 것이다. 법이 공정하지 못하고 있는 자 편에 선다면 정의는 죽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이기도 한 이런 주제를 <회란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13세기 중국 원나라 때 이참부가 쓴 잡극인 <회란기>는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거의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회란기>의 무대

무대는 단조롭다. 사방이 뚫린 무대 가운데 객석을 향하는 면을 빼고, 삼면은 손쉽게 등퇴장이 가능하다. 삼면은 마치 저택의 기둥인 양 기둥이 세워져 있고 천정에 지붕을 뜻하는 소품이 걸려있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이다. 무대 안쪽 가운데에 넓은 미닫이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인물들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특히, 포청천이 등장할 때 안쪽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강한 배경 조명 덕택에 실루엣이 강조되어 그의 위엄이 한껏 드러난다.

무대가 온전히 비어 있다 보니 배우의 움직임의 폭이 자유롭다. 연극의 커다란 특징인 관례를 강조하면서 배우의 신나는 연기가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펼쳐진다. 연극적 관례를 기반으로 인물과 대사의 흐름, 즉 줄거리에 따라 비어 있는 공간은 수시로 변한다. 장해당의 집, 마원외 집, 빙판, 지방 재판소, 포청천의 재판소가 된다. 조명이 안내하는 네모난 무대의 둘레는 칼을 쓰고 압송되는 장해당의 고단하고 험난한 머나먼 길이 된다. 간단한 소품들은 이러한 공간 변화를 돕는다. 연극의 관례는 연극을 가장 연극적인 것이 되도록 한다.

포청천이 등장하고 극이 중대한 전환의 시기가 왔을 때 흰색의 동그란 원이 그려진다. 원이 생겨나는 순간부터는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과 끝이 만날 뿐 아니라 중심에서 변까지의 길이가 똑같은 원은 절대 균형을 뜻한다. 원 안에서 해당의 범죄 사실은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새롭게 규명된다. 균형은 법의 생명이다. 따라서 원 안에서 벌어지는 판결은 재산 유무나 권력, 권모술수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사실만이 작용한다는 의미다. 원 안에는 오로지 두 여자와 아이만이 들어선다. 원은 어미와 자식이 인간에게 가장 원형적인 관계라는 점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누가 아이의 진짜 엄마인가? 이로부터 인물들의 운명이 엇갈린다. 지금이야 유전자 검사면 간단하게 확인될 수 있지만, 친자 또는 아들을 더 중시하던 과거에는 이런 사건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솔로몬 왕의 지혜가 요구된 것, <회란기> 그리고 최근에 브레히트가 <사천의 착한 사람>에서 제시한 사건들이 모두 같은 것을 보면 이 질문이 꽤 성행했던 것 같다.

그런데 <회란기>에서 보여준 것처럼 뇌물을 주고 증인을 조작하면 얼마든지 생모를 조작할 수 있다. 인간사 예외가 없이 적용되는 있는 자와 없는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분법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러한 집단적 조작이 한 사람을 어떻게 극한의 궁지로 내모는지를 똑똑히 목격하면서, 관객은 공연 내내 울분을 쌓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정의의 화신인 포청천이 모습을 드러내어 원을 그리라고 명령하면서 전환을 맞이할 때 시원한 속풀이를 경험한다. 몰입이 아닌 사건의 줄거리만으로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회란기>가 보여준 서사극 방식의 매력이다. 관객의 눈앞에서 한 연기자가 자신보다 더 큰 붓을 들고 힘 있는 몸짓으로 무대 바닥의 가운데 그려 낸 흰색의 원은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계략, 매수, 간계, 배신, 오해, 억울함이 난무하는 인간사를 풀어내는 원형 공간은 진실이 드러나는 신성한 공간이다. 그리하여 선량하게 살아왔지만, 마부인의 계략에 빠져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장해당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거울이다. 포청천의 명령에 따라 원이 그려지는 순간 천장에서 거울이 살짝 내려와 비스듬히 무대 바닥을 비춘다. 45도 각도로 위에 걸려있어 관객에게 바닥의 원을 비춰주는 거울은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다. 원이 바닥에 그려졌으므로 관객은 앞 사람에 의해 시선이 방해받을 수 있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원은 바닥의 원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객에게 친절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상하의 원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무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거울 덕택에 원은 두 개가 된다. 거울에 비친 원과 바닥에 그려진 원은 하늘과 지상은 물론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한다.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여자가 아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섰다면, 수직적으로 구분된 상하의 원은 자체로 인간의 선악을 은유한다. 일상에서 거울은 자신의 비춰보는 물건이다.

인간은 자기 얼굴을 직접 마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타인의 얼굴은 대면할 수 있지만, 자신은 오로지 거울에 반사된 얼굴만 볼 수 있다. 반사된 얼굴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알아간다는 점에서, 거울 속 얼굴은 허구나 그림자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진실함이 들어있다. 이렇게 본다면 원 안의 인물들은 공중의 거울에 투사됨으로 현실에서 쓰고 있는 거짓 가면을 벗겨내고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거울 덕택에 원 안에서 벌어지는 두 여자의 진실 공방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거울 효과는 연출의 커다란 미덕이다. 다만 이왕 거울을 활용한 만큼 상하의 거리 조절이나 각도 조절을 통해 더욱 의미를 확장했더라면 어땠을까?

재 회(灰) 가로막을 란(闌), 그리고 기록할 기(記)의 <회란기>(灰闌記)는 석회로 원을 그려 경계를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석회로 가로막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 번역은 아예 석회로 그린 원을 뜻하는 ‘The Chalk Circle’다. 석회로 그은 원의 내부는 원 밖의 세계와는 달리 장해당이 누명을 벗고 아이를 되찾아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배우의 연기 및 연출

배우의 연기 방식은 특이하다. 배우의 음성은 일상의 소리를 재현하는 사실적 음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전극에서 볼 듯한 과장된 음성도 아니다. 자신의 성격을 바탕으로 각자 인위적이며 연극적으로 만들어낸 음성은 양식화되어 있다. 음성과 발맞춘 배우의 몸짓도 마찬가지다. 캐릭터에 따른 움직임은 낯설지만, 전체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웃음이 나온다. 가령 돗자리를 들고 다니는 장림의 음성과 움직임, 마원외의 춤추는 듯한 흥겨운 모습, 포청천의 의연한 등장 등은 말이 없어도 이미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말해준다. 캐릭터와 조화를 이룬 연기 방식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준다. 그것이 작위적임에도 구태여 이를 숨기지 않는 태도는 서사극 방식이다.

연출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죽은 장해당의 어머니나 마원외는 간단한 천사 머리띠를 하고 무대에 나타난다. 그러면 관객에게 그들은 죽은 자의 현현이다. 이렇듯 간단한 소품은 의미의 세계를 넓게 확장한다. 또, 행여 사건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할 경우, “어쩌고저쩌고” 등의 대사로 얼렁뚱땅 넘어간다. 코믹한 대사와 몸짓은 이미 사건의 내용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불편함 대신 웃도록 한다. 이처럼 극은 소품, 음성, 몸짓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거리 두기를 통해 가볍고 경쾌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회란기>의 한 장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아이와 앵무새다. 5세 아이와 앵무새를 직접 출연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극에서는 이의 대안 중 하나로 인형이 제시되었다. 인형과 인형 조정자가 함께하는 아이와 앵무새는 산듯한 연출력으로 극을 입체적으로 이끈다. 인형 조정자는 굳이 숨으려 하지 않고 목소리 연기도 곁들인다. 그것이 낯설지 않은 것은 연기나 연출 등 전체적인 콘셉트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아이는 작품의 키워드다. 연극은 아이를 통해 세상살이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전한다. 두 여자가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다르다. 한 여자는 아이 자체만을 바라지만, 다른 여자에게 아이는 재산을 위한 수단이다. 두 차이는 인간다움의 차이다. 어머니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것과 재산으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의 차이다. 이 점에서 연극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연극은 선악의 대립을 강조하면서도 사실 그 속내는 진정한 모성애, 즉 인간의 사랑을 강조한다.

장해당은 아이를 소유하기 위해 결코 아이의 신체를 학대할 수 없다. 그녀에게 아이는 한 인격체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포청전이 바라본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피고의 억울한 누명을 벗긴 포청천의 판결은 그가 현명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해당의 단짝인 앵무새는 감초 역할이다. 극에서 앵무새는 인간의 언어를 반복하는 기계적 새가 아닌, 오히려 진실을 꿰뚫고 있는 존재다. 앵무새 덕에 극은 진지해지려는 무게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지고 재미가 있다. 아이와 앵무새 인형은 몰입을 방해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그것은 웃음을 주면서 거리 두기로 이어져 교육적 효과로 이어진다. 그 덕에 관객은 선악, 인간 대 비인간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된다. <회란기>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관객에게 직접 훈계하지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한 교훈을 제시한다. 이 연극은 일종의 교훈극이다. 그동안 극단 마방극이 보여준 힘은 상당하며, 이번에도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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