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극단이 극작가 아서 밀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야심 차게 내놓은 <시련>(박정희 연출, 고영범 윤색, 명동예술극장, 2015)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잘 알려진 작품이라는 점이다. 연극학과 대입을 앞둔 고3 학생이 연기학원에서 연습해야 할 목록에는 어김없이 <시련>이 들어 있다. 남자 주인공 프록터 그리고 소녀들의 우두머리 애비게일은 누구나 하고 싶은 강렬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다.
원작 <The Crucible>은 희곡이지만 영화로도 제작된다. 영화 제목은 <크루서블>로 니콜라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가 감독을 맡아 1997년에 개봉된다. 영어 크루서블은 ‘도가니’, ‘시련’ 등의 뜻이 있다.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을 뜻하는 도가니는 2011년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 <도가니>의 제목이기도 하다. 청각장애 특수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주도하여 학생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폭력, 성폭력 사건을 다룬다. 그렇다면 크루서블은 그릇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쇠붙이를 녹이듯 자행되는 악행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련>이 세일럼 마을이라면 <도가니>는 자애학교가 될 것이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작품을 공연할 때 연출가는 부담을 느낀다. 원작에 충실하면 독창성이 없다고 하고, 각색을 하면 충실함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는다. 잘 알려진 작품, 자주 공연되는 연극의 관객은 과연 이번 공연에서는 뭐가 새롭지 하는 호기심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이유로 2015년 12월, 명동의 수많은 인파 틈새를 헤집고 만난 <시련>의 특징이 과연 무엇일까, 질문하게 된다. 이 공연을 접했을 때의 첫인상은 속도감이었다. 특히 대사에서 빠른 템포가 느껴졌다. 이 속도는 약 155분 정도의 러닝 타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원작을 고스란히 소화한다면 대략 240분 정도 소요될 것이다. 각색·축소가 불가피할 때 남겨두어야 할 부분과 강조해야 할 부분을 결정하는 것은 작품의 색채를 결정하며 여기서 연출가의 역량이 드러난다. 이번 공연의 또 다른 특징으로 댄포스의 강조다. 3막부터 등장하는 이 인물에 대한 집중 조명은 여러 의미를 함축한다.

<시련> 줄거리
17세기말 미국 세일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마녀재판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극이라기보다 맥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당시의 미국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풍자한다. 당시 이곳은 청교도의 엄격함이 지배하던 시기로 인간의 본성을 죄악시하고 아이들이 노래하거나 웃는 것마저 경계했으며 춤이나 연극도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하였다.
<시련>은 4막으로 되어 있다. 막이 열리면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세일럼이 배경이다. 어두운 숲 속에서 몇몇 소녀들이 춤을 추고 비밀 의식을 거행하지만 발각되고 만다. 숨 막히는 종교의 억압에서 숲은 소녀들은 본성에 따라 춤추는 해방 공간이었지만, 소녀들은 마녀로 의심받게 된다. 그중 베티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사람들은 그녀가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고 믿는다. 소녀들의 우두머리인 애비게일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숨기고 마녀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마을 사람들을 마녀로 지목하기 시작한다. 2막에서는 마을 전체가 마녀사냥 광풍에 휘말린다. 애비게일은 과거에 연정을 품었던 농부 존 프록터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마녀로 지목한다. 프록터는 애비게일과의 과거를 부정하고, 아내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3막의 배경은 법정이다. 프록터는 애비게일의 거짓을 폭로하려면 자신이 간통을 범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다. 법정은 애비게일의 말만 믿고 더욱 많은 무고한 사람을 유죄로 판결한다. 4막에서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된다. 판사는 아내를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프록터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한다. 이제 그는 자신과 아내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양심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거짓 자백을 거부하고 교수형을 당한다. 그가 양심선언처럼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외침에서 극은 절정에 달한다.
이름이라는 것
세상 만물의 모든 것들은 이름으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던 것이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꽃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영혼과 육체의 탄생이 첫 번째 존재라면 이름 붙이기는 두 번째 존재가 된다. 이름이 호칭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 진실,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련>은 이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아서 밀러
밀러라는 이름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는 미국 현대 문학의 거목이다. 그는 1956년 매릴린 먼로(Marilyn Monroe)와 결혼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경력도 있다. 그의 삶의 방식, 미국 사회와의 관계, 참여의식은 문학 자체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통 희곡은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더구나 그것이 공연으로 완성되어 다수의 관중 앞에 다가설 때 사회에 울리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도덕적 양심으로 불리는 극작가로서 약자 편에서 그들을 옹호하고 미국의 자본주의에 인간성이 침식당하는 현상에 따끔한 일침을 가했던 밀러에게 삶의 철학이 시험대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청문회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는 청문회에서 그저 몇 명의 동조자 이름만 대면 풀려날 것이라는 회유를 당한다. 동료의 이름을 대는 행위, 동료를 팔아 자신의 안위를 담보로 삼는 행위는 밀러의 삶의 방식과 전면으로 어긋난다.
그는 이름을 대지 않는 대신 유죄 판결을 받고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아마 이름을 댔더라면 몸은 자유로웠을 테지만 영원한 죄의식의 철창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밀러는 이름에 대한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련>(The Crucible, 1692)이다. 작품으로 사회적 광기를 고발하는 작가다운 행동이었다. 밀러는 친구의 이름을 불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다. 작품에서 프록터가 이름을 댈 뻔한 상황까지 치달았던 것을 보면, 그도 혹시 누군가의 이름을 발설할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조지프 매카시 (Joseph McCarthy)
매카시라는 이름
매카시는 미국의 상원의원이다. 미국에서 상원의원은 권력의 상위를 차지하는 자리다. 초보 정치가였던 그는 미국 사회를 꿰뚫고 강력한 이슈를 만들어냄으로써 단번에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엄청난 숫자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포문을 열면서 정치 쇼를 시작한다.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지고 의회는 청문회를 열어 조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매카시의 주장은 증거 불충분으로 판명되었고 의회는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한다.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매카시는 쓸쓸한 뒤안길로 퇴장하지만, 그가 남겨 놓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미국은 공포 사회가 되었고 건전한 사회비판의 길이 막혔으며 일반인들 사이의 반목과 의심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시련>에서 소녀들에 의해 지목당한 사람들이 가차 없이 유죄로 선고를 받는 것과 흡사했다. 이름을 대는 것, 죄를 씌우는 것, 주민들 사이의 반목, 서로를 의심하는 흉흉한 분위기, 공포감은 매카시의 당시와 다를 바 없다. 애비게일이 벌여놓은 놀이판에 세일럼 전체가 흔들린 것처럼 매카시가 벌인 판에 미국 전체가 흔들렸다. 매카시의 이름은 마녀사냥의 한 전형이 되고 말았다.

연극 속 프록터
프록터라는 이름
<시련>은 애비게일을 비롯한 소녀들의 장난으로 시작되어 마녀사냥의 비극으로 치닫는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법정에서 소녀들이 마녀로 지목하면 누구나 피고가 되었고, 악마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 사면해 주겠다는 회유를 당한다. 준엄하고 위협적인 법정에서 판결을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의 관객은 답답하다. 허구를 진실인 양 호도하는 판사들, 지식인들, 목사들은 단단한 도그마에 사로잡혀 절대 다른 것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대답만이 인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묵살된다. 이미 결론은 났고 과정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무대에서만 일어날까. 관객인 우리 역시 사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프록터라는 인물이 있다. 밀러의 대변인인 프록터는 지극히 평범한 촌부다. 강직한 성격의 그는 어쩌다가 불륜을 범하는 실수를 한다. 요즘 세상이야 불륜이 그토록 치명적일 수는 없겠지만 당시 세일럼의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불륜은 십계명을 어긴 것이므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 된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주민들의 신망도 얻었으나 본의 아니게 자기 입으로 스스로의 불명예를 말해야 하는 올가미에 걸려든다. 그것도 모자라 프록터는 악마와 결탁한 자로 고발된다. 이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름을 파는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자기 이름 아래 서명하여 만인이 볼 수 있도록 교회 문 앞에 자백서를 걸어놓는 것이다. 프록터는 망설인다.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까짓것 악마와 놀아났다고 자백하는 거야 뭐가 대수겠는가. 그럼에도 망설이는 것은 바로 이름 때문이다. 양심을 파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이름을 파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이름이야말로 육체와 생명을 넘어 제 이의 존재가 아니던가. 결단을 내린 프록터는 자백서를 찢어 버리고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이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평범했던 남자는 고귀한 이름을 지키기 위해 영웅적인 외침을 외친다. 연극에서 이 부분은 압권이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그건 내 이름이기 때문이오! 난 내 인생에서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없소! 나는 거짓에 서명했고, 거짓을 말했소! 나는 이미 죽어간 사람들의 발의 먼지도 못한 존재가 되었소! 이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이오? 나는 당신들에게 영혼을 주었소. 제발 내 이름만은 남겨두시오!”(Because it is my name! Because I cannot have another in my life! I have lied and signed myself to lies! I am no more worth than the dust on the feet of them that hang! How may I live without my name? I have given you my soul; leave me my name!)

영화 속 프록터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가 되기 위해 모든 앞 장면은 준비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96년 제작된 하이트너의 영화도 그랬고 2007년의 공연도 그랬고 이번 공연도 그랬다. 이름을 지키기 위한 프록터의 외침이 온 세상에 메아리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존 프록터를 연기한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연극 <시련> 포스터
배우 이순재라는 이름
원작에서 인물 댄포스의 역할은 미묘하다. 프록터와 애비게일과 비교해 볼 때 중심인물로 보기에 미약한 면이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이번 공연의 특징 중 하나는 댄포스의 강조였다. 4막 가운데 3막부터 등장하는 보스턴 부주지사이자 판사인 댄포스는 법정 권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마녀재판을 이끈다. 영화에서 댄포스 역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배우 폴 스코필드였다. 그는 강력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으로 법정을 압도한다. 연극에서 댄포스 역은 더블 캐스트다. 한 사람은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원로배우 이순재고 다른 한 사람은 남 저음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호성이다. 선호하는 배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이순재의 댄포스를 보았다. 노배우는 자체로 존경의 대상이다. 더구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연극무대에 선다는 것은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던지고 성찰하려는 자세로 보아야 한다.
연출 박정희라는 이름
대학로에서 박정희는 작가적이고 개성적인 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그간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깊이 있는 연구로 난해한 작품을 풀어왔기 때문이다. 주네의 <하녀들>에서 보여준 제의성은 그의 독창적 해석이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박상륭의 소설을 각색한 <평심>은 창의력 있는 무대로 평가받았다. 역시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은 주네의 <발코니>에서 공간 해체의 독특한 감각의 연출력을 선보였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문제작들에 도전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성향의 박정희 연출가와 국립극단의 만남이라는 자체만으로 관객은 설렘이 있다. 과연 그의 연출 스타일이 밀러의 <시련>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흰옷의 잠옷(소복)을 입은 소녀들이 등장하고, 36석의 객석을 무대에 올려놓아 배심원을 만들어 놓고, 나무 재질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돋우고, 댄포스를 강조한 것은 연출가가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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