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만남: 익숙함 속의 신선함
처음 연극 <유령>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입센의 그 유명한 <유령>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러나 서울시극단이 2025년 시즌의 두 번째 작품으로 선보인 <유령>은, 현재 서울시극단장인 고선웅 작가 겸 연출가의 순수 창작극이었습니다. 그간 다채로운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연출해 온 그는 <늙어가는 기술> 이후 무려 14년 만에 선보이시는 창작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선웅 연출은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과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회란기>, <지킬 앤 하이드>,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광화문 연가> 등 그의 대표작들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기발한 연출로 늘 깊은 인상을 선사해 왔습니다.
제가 6월 1일 오후 3시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았던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 광장은 뜨겁지 않은 햇살을 만끽하려는 가족 단위의 인파로 가득하여 활기찬 모습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메타연극'의 향연
<유령>은 연극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고선웅 특유의 연출 미학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조명이 환하게 켜진 상태에서 여배우가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소통합니다. 이때 관객들은 '지금 연극이 시작된 것이 맞나?' 하는 아리송한 물음을 던지게 되지요. 그녀는 자신을 '배명순이자 정순임'이라고 소개하며, 이름이 두 개인 이유가 남편의 폭력 때문이라고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곧이어 남편이 등장하여 배명순을 폭행하고, 뒤이어 분장사라고 자칭하는 다른 여배우가 분장 도구를 밀고 들어와 폭행당한 배명순의 얼굴에 핏자국을 칠합니다. 이처럼 연극은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곧 연극임을 인지시키는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배우들은 때로는 연습 중인 배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나 연출가를 소환하기도 합니다. 7명의 배우는 상황에 따라 놀랍도록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내는데, 이러한 다채로운 역할 소화야말로 <유령>을 독특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유령>은 한마디로 '연극에 대한 연극', 즉 메타연극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입니다. 메타연극이란 연극의 본질, 구조, 허구성, 그리고 관객과의 관계 등을 스스로 드러내거나 연극 자체에 대해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연극을 의미합니다. 연극 형식을 소재로 삼거나, 연극적인 장치들을 관객에게 의식시키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요. 배우가 극 중 인물이 아닌 '배우 자신'임을 드러내거나 연기 도중 갑자기 "이거 연극이잖아!"라고 말하는 것도 메타연극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처럼 메타연극의 성격이 짙은 <유령>은 극중극(연극 속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현실과 연극 속에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일반적으로 연극이 스스로 연극임을 자각하도록 하는 메타연극은 관객들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힘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마치 연습 장면과도 같은 연극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역시 하나의 거대한 연극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 의구심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메타연극은 사회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탁월한 특징을 지닙니다. 즉, 자기 반영적이고 해체적인 메타연극을 마주하며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고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메타연극의 특징은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던져온 고선웅 연극의 흐름을 볼 때 매우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령>이 추구하는 이러한 메타연극의 방식은 '세상은 무대'라는 세상 연극(theatrum mundi)의 개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세상 연극(theatrum mundi):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인가?
세상 연극의 관점에서 인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연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는 세상 연극과 관련된 매우 유명한 대사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은 온통 하나의 무대이고 / 남녀 모두 한낱 배우일 뿐이지요. / 각자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 생전에 여러 가지 역을 맡지요, / 인생은 7막 극이니까요."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
세상이 무대이고, 인생이 7막이며, 인간은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며 다양한 역할을 맡는 배우로 살아간다는 이 대사는 세상 연극의 정수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특히 인생이 7개의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무척 흥미롭지요. 삶의 연극성을 강조했던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런던의 글로브 극장(The Glove) 입구에는 “배우는 온 세상을 연기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Totus mundus agit histrionem"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와 당시의 사상적 흐름 속에는 삶이 곧 연극이라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세상 연극의 개념에 따르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일종의 배우로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존재인 셈입니다.
삶이 한 편의 연극이라는 '세상 연극'의 개념은 셰익스피어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키케로는 "연극은 인생의 모방이며, 관습의 거울이며, 진리의 반영이다"라고 말하며 연극을 인생에 비유했습니다. 삶을 모방하는 연극이 진리를 반영한다는 키케로의 언급은 매우 흥미롭지요. 키케로 이전의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나 작가들에게서도 세상 연극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 연극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계는 무대이고 인간은 배우입니다.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는 '세계'라는 무대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인 것이죠. 이는 곧 <유령>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둘째, 인생은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하나의 연극입니다. 즉, 우리의 삶은 각자의 이야기로 구성되며 '세계'라는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연극은 개인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에 따라 비극이 될 수도, 희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 인간이 행하는 역할은 무대에서 가면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황과 관계에 따라 표정과 역할이 달라지는데, 여기서 '표정'은 가면, 즉 페르소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세상 연극은 서양 중세의 신 중심 사상을 반영한 측면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배우인 인간은 신이 배정한 배역만을 수행할 뿐, 주어진 역할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요. 이는 인간이 신에 의해 주어진 운명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운명적인 존재인 인간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내적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삶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배명순의 삶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운명적 역할론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고대로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세상 연극의 개념에는 강한 운명론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상 연극의 개념은 변화를 맞이합니다. 신 대신에 스스로를 변형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죠. 대표적인 인물로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예브레이노프의 세상 연극, 그리고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고프먼의 세상 연극을 들 수 있습니다.
고선웅 연출이 "세상은 무대고, 인간은 배우라는 말을 무대에서 증명해 보고 싶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세상 연극의 관점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주어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특정 무대(상황)에서 관객(타인)에게 자신을 연기한다고 보는 것이죠. 따라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수시로 바뀌는 역할을 끊임없이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령>에서 배명순이 정순임으로 바뀌는 순간 그녀의 인생이, 즉 그녀의 모든 역할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남편은 폭력적인 남편 역할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맞았던 아들의 역할도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때리면서도 작가에게 "왜 자신에게 폭력적인 역할을 주었냐"고 항변합니다. 한편으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는 이 장면에는, 연극 내내 관통하는 '인간은 그가 행하는 다양한 사회적 역할에 의해 성립한다' 철학적인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아들, 남편, 아빠, 직장인 등의 역할을 하며, 여자는 딸, 아내, 엄마, 직장인 등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지하철을 타거나 식당에 들어가면 '손님' 역할을 하게 되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인지 <유령>에서 남편은 오사장, 박사장, 형사의 역할을 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매 순간 바뀌는 역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유령>이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행하는 역할이 나의 정체성이라면, 순간순간 변하는 다양한 역할이 나의 정체성이라면, 과연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명확히 말할 수 있을까요? 우주 만물이 항상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또한 이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I am nowhere': 유령의 존재론적 질문
<유령>의 시놉시스 첫 줄에 제시된 영어 문구 'I am nowhere'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문장 그대로 '나는 아무 데도 없다'는 의미이지만, 문맥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일단 언어유희로 띄어쓰기에 따라 'I am now here.'(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가 되어 부재와 존재 사이의 미묘한 대비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nowhere'는 길을 잃거나 정체성을 잃었을 때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것'이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감 상실, 삶의 무의미함, 소외됨과 같은 내면의 고립감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숨 쉬고 밥 먹고 살아 있으되 존재감이 없는 주인공처럼, "존재하고 있어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도 증명할 수 없는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가 바로 '유령', 즉 'I am nowhere'인 것입니다.
또한 프로그램에 제시된 흥미로운 문장이 있습니다. "극장에 배우들이 모여 있고 그들의 역할이 시작된다." 참으로 재미있는 구절이지요. 보통은 배우들이 극장에 모여 연기를 한다가 되겠지만, 그들의 역할이 시작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세상 연극 그리고 역할론을 강조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배우들이 극장에 모였고 그들이 연극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역할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배우들이 역할을 시작할 때 비로소 그들의 존재감이 생겨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역할이 있을 때 배우로서 존재감이 생겨나고, 이를 확대하면 현실에서도 역할로서 삶이 이루어지므로, 역할이 없다면 '유령'에 다름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지하의 역할? 배명순의 역할? 정순임의 역할? 그녀는 유령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일상에서 우리 삶은 다양한 역할들로 이루어집니다. <유령>은 이러한 사회의 역할을 "극장에 배우들이 모여 있다. 그들의 역할이 시작된다."로 압축하여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무대에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는 '역할 속 역할'인 걸까요? 즉, 배명순과 정순임을 연기한 배우 이지하는 현실의 '배우'라는 역할을 가지고 무대에서 다른 두 인물의 역할을 맡아 연기한 것일까요? 이렇듯 <유령>은 역할을 기준으로 연극과 현실,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이 모호성은 곧 '유령'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배명순은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의 가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배명순은 이름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민등록도 없이 새로운 인생을 위해 정순임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합니다. 그러나 주민등록 없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고, 있어도 없는 사람, 즉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온갖 불법적인 처우를 받지만 주민등록이 없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주민등록이 없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유령의 삶인 것이지요. 우여곡절을 겪으며 유령처럼 살아가던 정순임은 16년이 지나서야 본래의 이름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이미 암이 온몸에 퍼진 상태였고, 그녀는 무연고자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배명순은 죽어서 시신 안치실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화장되지 못한 채 173일을 떠돌던 두 유령을 만납니다. 그녀와 두 유령은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온전히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역할론에 따르면 배명순은 일상의 어떤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어쩌면 연기가 미흡한 배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유령>의 무대: 침묵의 증인들
세종문화회관 S 씨어터에 들어서면 블랙박스 무대가 관객들을 맞이합니다. 바닥에는 흰색의 비석 같은 오브제들이 한 줄에 네 개씩 네 줄로, 총 열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비석이라고 단정하는 까닭은 생김새도 그러하지만, 연극의 제목이 <유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우들의 대사와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을 단순히 비석이라고만 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배우들이 그곳에 올라서기도 하고, 그들을 피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이 오브제들은 어느덧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존재하지만 전혀 방해물로 작동하지 않는, 있지만 없는 것 같은 이 존재감은 마치 유령을 닮아 있습니다. 무대 뒷배경 역시 밝은 조명으로 구획된 12개의 네모 칸이 선명하게 눈에 띕니다. 저것이 과연 무엇일까, 극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마지막 영안실 장면에서 시체를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니 시신 보관소를 형상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S씨어터의 무대를 십분 활용하여 세 유령이 하늘로 승천하고, 마네킹 시체들은 땅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제의(祭儀)가 화려하게 펼쳐지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귀신' 말고 '유령'? 제목에 담긴 의미
연극의 제목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죽으면 흔히 '귀신'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반면 '유령'은 서양에서 온 개념으로, 기독교 세계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처럼, '유령'은 감정보다는 존재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해코지를 하기보다는 출몰하거나 떠도는 존재로 묘사되는 유령은 현실과 저승, 혹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보통은 추모, 기억, 정체성 등의 상징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반면, 죽은 사람의 혼령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귀신은 한, 원한, 억울함 등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연극의 제목이 무섭고 위협적인 귀신이 아닌, 슬프고 외롭고 중립적인 유령인 것은 아마도 주인공 배명순의 존재, 그리고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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