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 연극 <생추어리 시티>(연출 이오진, 번역 유은주, 2025년 4월 22일~5월 10일)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는 지난 4월 26일 토요일 오후 3시 공연을 관람하였는데, 한글 자막과 청각 장애인 관객을 위한 수어 통역이 제공되어 더욱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던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작품 소개 및 시대적 배경
2023년 오비 어워드 극작 부문을 수상한 <생추어리 시티>는 퓰리처상 수상작인 <Cost of Living>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미국의 극작가 마르티나 마이옥(Martyna Majok)의 작품입니다. 2021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뉴욕시 극장에서 초연되어 평단의 호평을 받았죠.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든 이 작품은 이민자의 정체성, 친구와의 관계, 그리고 생존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인 'Sanctuary'는 '안식처' 또는 '보호구역'을 의미하며, 'Sanctuary City'는 미국의 미등록 이민자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지역을 일컫는 은어입니다. 2025년 트럼프 정부가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 정책을 예고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시의적절하게 다가옵니다.
연극의 흐름과 인물들의 서사
이 연극은 특별히 막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시간과 줄거리의 흐름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번 공연에서는 전반부가 끝난 후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 소품이 재배치되어, 마치 막간을 직접 목격하는 듯한 독특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1부: 위태로운 청춘의 연대
극은 뉴어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시작됩니다. 베란다를 통해 불쑥 들어오는 G(여)와 그녀를 맞이하는 B(남), 이들 청소년은 모두 이민자 가정 출신의 서류 미비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 서로에게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자아냅니다. B의 엄마는 가정폭력과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고, G는 엄마와 함께 살지만 동거인의 폭력과 통제에 시달립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몰래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이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보호자가 되어 줍니다.
불안정한 신분으로 살아가던 중, G에게 엄마 덕분에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반면 시민권을 얻기 어려운 B는 대학 진학도, 정식 취업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G는 시민권자가 되면 B를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결혼을 제안합니다. 서류상 결혼을 통해 B 역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 속에서 두 사람은 미래를 꿈꾸지만, 서로에 대한 기대와 부담감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2부: 변화된 관계와 냉혹한 현실
무대 장치가 바뀌고 시간이 흐른 후, 두 인물은 10대가 아닌 20대 초반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G는 시민권을 얻어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B는 여전히 서류 미비자로 불법적인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꺼내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조차 모호해 보입니다. 이때 제삼의 인물 헨리가 등장합니다. 원작에서는 헨리와 B의 관계가 미묘한 끌림으로 표현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이들의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G와 헨리는 각자의 입장에서 B와의 관계를 모색하려 하지만,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G 또한 여전히 B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지만, 자신이 그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녀 역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지만, 결국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B는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누구도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습니다. 이렇듯 B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사회 체제의 불완전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칩니다. B가 홀로 남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관계를 통한 구원보다는, 그저 한 인간의 처절한 생존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인물 설정과 연기
이 연극에는 B, G, 그리고 헨리,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B와 G가 이름 대신 영문 이니셜로 표기된 점이 특히 눈에 띕니다. 혹자는 B를 'Boy', G를 'Girl'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이들이 보편적인 이민자 소년과 소녀를 대변하거나, 혹은 사회에서 이름 없는 존재, 즉 '있지만 없는 존재'라는 주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2막(?) 이후에 등장하는 헨리는 어엿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금발의 백인 남성이었을 법한 체형과 어투를 지닌 헨리는 로스쿨에 다니는 인물로, 두 주인공과는 대조적으로 미국 주류 사회의 인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B를 연기한 김의태 배우와 G를 맡은 이주영 배우의 연기는 무대 속 인물이라기보다 꾸밈없는 일상의 모습을 보는 듯 자연스러웠습니다. 작품의 대사는 교환이 빠르고 생생한 리듬감이 살아있으면서도, 절제되지만 강렬한 감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무대 연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 전반부의 대사는 간결하고 리듬감이 넘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단문들은 이민자들의 긴박한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들의 대화는 감정을 드러내는 말을 아끼고, 짧은 주고받음 속에서 서늘함이 묻어납니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저변에는 깊은 절망이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간 연출: 미니멀리즘으로 담아낸 삶의 궤적
<생추어리 시티>의 무대 연출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가운데 위치한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에 객석을 배치하여 관객들이 서로를 마주 보도록 설계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는 극 중 인물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냉혹함과 그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주었습니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만큼, 무대 장치는 최소화되었습니다. 특히 전반부 무대에는 차가운 재질의 소품 하나가 침대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입니다. 두 인물은 오직 조명과 음향의 도움을 받으며, 빠르게 혹은 침묵 속에서 주고받는 대사와 연기만으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창조해냅니다. 조명은 대체로 쓸쓸하고 어두운 톤을 유지하지만, 인물이 감정을 드러낼 때면 그에게 집중하고, 감정의 변화에 따라 빛의 뉘앙스도 미묘하게 달라져 섬세한 연출이 돋보였습니다. 또한, 톡톡 튀는 팝콘처럼 짧은 대사와 조화를 이루는 음향은 세련된 느낌을 더했습니다.
무대 변화: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변주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관객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에서 무대를 재세팅하는 장면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연극처럼 느껴질 정도로 몰입감을 높여주었죠. 이러한 무대의 변화는 단순히 장면 전환을 넘어, 극 중 시간의 흐름과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재세팅된 공간은 여전히 B가 거주하는 곳이지만, 전반부의 텅 빈 공간에 비해 제법 구색을 갖춘 모습이었습니다. 지붕이 생기고 소파 등 몇몇 생활용품이 추가되어 이전보다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간의 의미는 사뭇 다르게 다가옵니다. 비어있던 전반부의 공간이 청춘의 절박함 속에서도 생기 있는 에너지를 간직한 공간이었다면, 채워진 후반부의 공간은 피곤하고 조용한 절망, 그리고 관계에 균열이 생긴 인물들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작품의 핵심 메시지: 경계에 선 존재들의 질문
<생추어리 시티>는 이민자 청소년들이 겪는 정체성, 생존, 우정, 그리고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룹니다. 특히 미국 내 서류 미비 청소년(DREAMers)의 현실을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합법적인 취업도, 영구적인 법적 지위를 위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는 우울한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법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곧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연결됩니다. B가 G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것이 진정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관객들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연극은 두 인물의 우정과 사랑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관계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시민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며, 삶이라는 것이 절대 녹록지 않다는 현실 또한 보여줍니다. 시민권, 사랑, 생존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과연 삶에 진정한 안전한 곳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빠른 대사와 절제된 감정, 그리고 미니멀리즘 무대를 통해 인물들의 불안정한 삶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결국, 구원보다는 생존을 택하는 결말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존재론적 질문과 여운
제목인 <Sanctuary City>는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법적으로 이민자 보호를 표방하는 도시를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개인이 안전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과연 진정으로 안전한 곳은 존재할까요? 그리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두산아트센터에서 펼쳐진 이번 공연을 관람하며, 관객으로서 저 역시 두 사람의 앞날, 특히 B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조바심과 궁금증으로 가득 찼습니다. 연출가와 배우들의 뛰어난 역량 덕분에 120분의 공연 시간 내내 지루함 없이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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