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두산인문극장은 지역(Local)이라는 주제 아래, 우리 사회가 마주한 지역의 다양한 면모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넘어, 공동체의 의미를 지닌 지역이라는 질문, 즉 “당신의 지역은 어디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죠.
물론, 미디어의 발달로 지역의 개념이 희미해진 현대 사회에서도 정치적 차원의 지역 갈등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두산인문극장은 이러한 지역 문제가 다름 아닌 ‘쏠림’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며, 강연, 공연, 전시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편중과 편파는 인류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 왔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주제를 통해 지역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룰 필요성은 더욱 강조됩니다.
지역 문제를 조명하는 뮤지컬 <광장 시장>
특히 올해는 세 편의 공연 중 뮤지컬 <광장 시장> (2025. 6. 17 ~ 7. 5)이 눈길을 끕니다.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서울의 유서 깊은 광장 시장을 배경으로 삼아 지역 문제를 예술적으로 탐구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왜 뮤지컬인가? - <광장 시장>을 통해 본 뮤지컬의 매력
최근 뮤지컬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얼마 전 제78회 토니상에서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쾌거를 이룬 <아마도 해피엔딩> 소식처럼 말이죠. 단순히 노래와 춤을 곁들인다고 해서 뮤지컬이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뮤지컬은 노래와 춤으로 감정을 극대화하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어와 몸짓에 집중하는 연극과 달리, 뮤지컬은 시각, 청각, 그리고 움직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관객의 몰입과 감정이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노래와 춤을 통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성은 물론, 춤, 의상, 합창, 조명 등 풍성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하여 생생한 라이브 사운드와 배우들의 뜨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장점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뮤지컬은 노래와 대사로 구성되며, 때로는 노래하듯이 말하는 레치타티보가 섞이기도 합니다. 물론 전체가 노래로만 이루어진 뮤지컬도 있지만, 계속해서 노래가 이어지면 관객의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간에 대사를 삽입하여 관객에게 쉼을 주거나 극의 템포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뮤지컬에서 대사는 줄거리나 정보 전달, 갈등 설정에 활용되며,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노래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광장 시장> 역시 이러한 뮤지컬의 특징을 잘 살려, 대사, 노래, 그리고 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특히, 가볍고 발랄하며 경쾌한 노래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이따금 삽입된 이탈리아 가곡은 극에 신선한 양념 같은 역할을 하며 특별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처럼 두산인문극장은 ‘지역’이라는 주제를 뮤지컬 <광장 시장>과 같은 다채로운 예술 형식으로 풀어내며 우리 사회에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뮤지컬 <광장 시장> 줄거리 : '지역'을 넘어선 공동체의 이야기
뮤지컬 <광장 시장>은 제목 그대로, 광장 시장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두산아트센터 맞은 편에 위치한 이곳은 1905년 개장 이래 한국사의 굵직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오늘날에는 먹자골목으로 유명세를 타 외국인 관광객마저 찾아드는 명실상부한 명소가 되었죠.
굳이 광장 시장이 아니더라도, 시장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삶의 터전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 공동체의 삶과 정서,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곳입니다. 상인들이 서로를 이웃사촌처럼 여기고 단골손님과 정답게 안부를 주고받는, 이른바 한국의 정(情)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바로 시장입니다. 서로 연결되고 소속감을 느끼며, 배려와 관심이 넘치는 공동체적 가치가 구현되는 장소이자, 동시에 생계를 위한 일터이자 자립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뮤지컬 역시 이러한 시장의 다층적인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미얀마 출신 아응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갑니다. 음악을 전공한 꿈 많던 소녀였던 그녀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남동생은 태국으로, 자신은 한국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군부에 희생되는 비극을 겪죠. 한국에서 불법 체류자가 된 아응은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불안하고 힘든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민 첫 인연은 덕자 할머니였습니다. 아응은 전남의 한 시골에서 덕자 할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삶을 이어갑니다. 밥그릇에 가득 담긴 고봉밥을 보며 아응은 비로소 평화를 느낍니다. “밥은 곧 평화”라는 메시지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덕자 할머니는 아들을 시골에서 광주로 유학 보냈다가 80년 민주화운동 때 군인에게 희생당한 아픔을 지닌 인물입니다. 덕자 할머니는 아들을 밭에 ‘심었다’고 말하며 슬픔을 승화합니다. 이처럼 덕자 할머니는 지역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피부와 언어가 다르지만, 불안과 고통을 겪는 아응의 모습에서 자신의 아픔을 발견하고 깊이 공감합니다. 어느 날, 고봉밥을 퍼주던 덕자 할머니는 아응에게 용기를 주며 꿈을 찾아 떠나라고 권유합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아응이 삶의 새로운 터전으로 자리 잡은 곳이 바로 광장 시장입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밥 배달을 하며, ‘밥이 평화라면, 밥 배달은 곧 평화를 배달하는 일’이라는 의미를 실천합니다.
광장 시장의 상인들은 저마다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이웃사촌들입니다. 그들이 지역의 경계나 출신을 따지지 않고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는 이유는, 시장이라는 공간이 지닌 공동체적 가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장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밥벌이’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대감 속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온 아응 역시 따뜻하게 품어집니다. 이처럼 뮤지컬 <광장 시장>은 주인공의 출신을 통해 ‘지역’의 의미를 한반도 넘어 외국으로까지 확장합니다.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이 시점에서 이러한 시선은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시장을 닮은 무대 : <광장 시장>의 독특한 공간 연출
뮤지컬 <광장 시장>은 시장이라는 공간이 지닌 의미를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절묘하게 연결하며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합니다. 사실, 과거의 시장터는 곧 연극 무대였습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삶의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라는 점, 상인들의 말과 몸짓이 곧 노래와 대사, 춤과 연기가 된다는 점, 시장의 즉흥성과 참여성이 뮤지컬의 라이브성과 관객 몰입으로 이어진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처럼 뮤지컬 역시 여러 인물의 다채로운 감정 표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시장은 곧 뮤지컬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뮤지컬 <광장 시장>은 자체로 풍성한 시장과 뮤지컬의 요소가 완벽하게 통합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극장 ‘Space 111’에서 공연된 <광장 시장>의 무대 연출은 독특합니다. 관객이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일반적인 객석과는 전혀 다른 구조에 잠시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의 연극 공간이 무대와 객석으로 명확히 양분되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라면, 이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실제 광장 시장에 들어선 것처럼 테이블과 의자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관객은 자연스럽게 시장에 온 손님이 되어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관객은 시장의 동참자로서, 함께 호흡하며 시장과 인물들의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공간의 양옆에 몇 개의 의자가 객석처럼 놓여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시장 상가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무대 한쪽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자전거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배우가 자전거에 앉아 페달을 밟으면 스크린에 시장 풍경이 흘러가 관객은 마치 자전거가 실제로 움직이는 듯한 착시 현상을 경험합니다. 공간 좌우에는 자막을 위한 스크린이 있어 장면과 장소를 제시하거나 인물의 대사를 자막으로 보여줍니다. 배우의 발성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빠르게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든 대사를 정확히 듣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자막은 관객의 이해를 돕는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자막을 보느라 배우에 대한 집중도가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죠. 자막에 제시된 내용을 보면, <광장 시장>의 줄거리는 총 25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공연 시작 전 일찍 도착하여 공연장 내부에 서너 명의 관객만 있을 때 자유롭게 자리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전체 공간을 훑어본 후, 스크린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곳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공연을 보는 내내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배경으로 나타나는 스크린의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정면에서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물 : 광장 시장을 채우는 다채로운 얼굴들
뮤지컬 <광장 시장>은 주인공 아응을 중심으로 시장 사람들, 그리고 잠시 등장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덕자 할머니가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정대진 배우가 열연한 스물다섯 살의 아응은 시장에서 자전거로 밥 배달을 하는 데 능숙하여 그 모습이 거의 서커스 수준으로 묘사됩니다.
아흔의 나이에도 밥집을 굳건히 운영하는 오국자는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인물로, 아응이 일하는 식당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배우 강정임은 오국자 외에도 양구 할머니, 차옥, 할머니 1, 그리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능숙하게 소화하며 팔색조 매력을 선보입니다. 놀랍게도 정 많고 오지랖 넓은 전주댁은 사실 남자인데, 죽은 아내가 걸어둔 칼국수 노점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며 아내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냅니다. 박현철 배우는 전주댁 외에도 할머니 3과 여러 여성 캐릭터로 변신하며 극의 활력을 더합니다.
백반집 상식이네의 주인 상식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송석근 배우는 상식과 함께 애석, 등산복 아저씨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 극의 전환점을 만듭니다.
환갑의 나이에도 재봉틀을 놓지 않는 재봉틀 역의 윤현길 배우는 옥천미용실 원장, 애석의 여자, 덕자, 등산복 아줌마, 중년 아줌마, 할머니 2, 그리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로 분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이탈리아 가곡을 즐겨 부르는 노래 선생님 역의 이지현 배우 역시 김약사, 조피디, 취준생, 전주댁 할머니,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오가며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배우들이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일인 다역(一人多役)은 시장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반영하여 다양한 인물 군상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수많은 사람을 마주치게 되니까요. 배우들은 관객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놓인 모자를 쓰며 순식간에 변신하기도 하고, 심지어 관객에게 직접 모자를 씌워 주기도 합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역할 변화는 어설프기보다는 오히려 극의 재미를 더하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합니다.

불안에서 평화로 : 밥과 사람, 그리고 공동체의 힘
주인공 아응은 불법 체류자라는 불안한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언제든 체포되어 강제 귀국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습관까지 생겼죠. 그녀의 이러한 불안은 단순히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삶을 시작하는 이들이 겪는 보편적인 불안감을 대변하며, 단지 살기 위해 한국에 왔을 뿐인데 범법자로 낙인찍힌 현실의 냉정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응은 냉정한 사회 속에서도 덕자 할머니의 따뜻한 고봉밥에서, 그리고 광장 시장 사람들의 온정 속에서 평화를 찾아갑니다. 삶의 불안이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의 평화 또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죠.
작가는 아응이 덕자 할머니에게서 느꼈던 평화가 광장 시장까지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시장 상인들의 보살핌 속에서 아응은 고향 미얀마에서조차 꿈꿀 수 없었던 평화를 느낍니다. 아응이 혼자서는 이룰 수 없었던 평화는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따뜻하게 손을 마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응에게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광장 시장과 그곳을 지키는 시장 사람들은 곧 평화인 셈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평화가 결코 혼자 얻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극적 구조와 무대 연출의 미학 : 몰입을 유도하는 시장 경험
뮤지컬 <광장 시장>의 줄거리는 아응과 시장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여과 없이, 즐겁고 경쾌하게 풀어냅니다. 특별히 갈등을 유발하는 악역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송석근 배우가 상식과 번갈아 연기한 애석이 아응을 찾아다니고 그녀를 숨겨주는 시장 사람들 사이에서 소소한 갈등이 발생하지만, 이는 오히려 유쾌한 웃음을 자아낼 뿐입니다. 즉, <광장 시장>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극적인 긴장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객은 마치 시장 구석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는 것처럼 편안한 상태에서 극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때로는 극적 클라이맥스의 부족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소극장 ‘Space 111’이라는 밀착형 공연임에도 배우들이 와이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관객 사이사이를 오가며 연기하는 만큼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입니다. 아마도 뮤지컬의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거나, MR(반주)에 배우들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광장 시장>은 ‘지역’의 의미를 확장하고 사람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객에게 특별한 시장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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