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주의에 의해 탄생한 현대 과학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의거한다면 "진실한 인식은 우리를 해방시킨다"라는 스피노자의 언급은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과학은 그 출현의 주체인 인간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명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사물 속에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다. 그저 인간에 의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언급되는 그 자체일 뿐이다. 또한 인간은 일단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이들을 만들어 내거나 변모시키거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이 같은 사유는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실존주의 철학은 실존주의자들만큼이나 이론이 다양하고, 철학자들 역시 일관된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인간의 주체적인 존재와 행동을 강조하며, 인간은 불안과 부조리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해 나가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주된 포인트로 놓는다면, 그의 철학은 인간 존재와 자유라는 명제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실존은 만들어진 사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병을 예로 든다. 이 물병은 실존하기 이전에 용도(물을 담는 그릇)와 모델에 따라 사고되고 디자인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물병은 우선 사고였으며, 말하자면 실존 이전에 본질이 존재했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 이전에 실존한다. 물병과는 달리 그다음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명제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사물과는 달리 인간 본성의 개념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본질을 선택한다. "인간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결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인 것이다. 우리는 핑계도 없고 고독하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지고 있다. 인간은 아무런 근거할 만한 것도 없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시시각각으로 인간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형벌에 처해지고 있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 한 인격은 사전에 의도된 모델이나 정확한 목적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것을 할지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르트르가 인간 실존에 대한 구속적인 조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변증법적으로 자신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스피노자가 '진실한 인식'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를 파악하고 해방을 얻는다고 보았다면, 사르트르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비로소 주체적 존재로 해방된다고 본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사르트르는 “모든 인간은 상황 속에 있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에는 동의한다. 살아 있는 인간은 신체를 지니고 있고 과거가 있으며 장애물을 만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인간은 자신의 의식에 따라 상황을 부여한다. 예컨대 어떤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은 억압을 받고 저항하고픈 느낌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이 반항의 기투(projet)에 의해 이렇게 의식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기투에 의해 동일한 상황을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나의 현재의 상황에 대해 나의 의도를 기투하면서 “이 상황을 자유롭게 행동의 수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이다.” 인간이 비극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처할수록 인간은 더욱 거기에서 빠져나올 필요성을 느끼며 이를 위한 수단을 찾는다. 나의 의식에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내리는 결정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내 자유의 거울이다.” 즉 세계는 나로 하여금 반응하도록 하고 초월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초월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가올 기투에 의해 억압된 현재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다.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우리는 자유롭도록 단죄되어 있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여기에 해당한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선택은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어제 한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이 내일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가 만일 나의 삶을 매 순간 바꾸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실존하는 한 나는 나의 미래를 결정한 근원을 소유하며, 이를 통해 나는 변모할 수 있고 나의 과거를 구제할 수도 있다. 나의 자유는 죽음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는다. 내가 실존하기를 멈추는 순간부터 나의 삶은 운명적으로 변화된다. “나의 삶은 살아있는 자들의 시선에 의거하여 언급될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 없는 방(Huis-Clos)>의 등장인물들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다. 그들은 갇힌 방에서 나가고 싶어 하지만 마지막 순간 문이 열렸음에도 아무도 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죽어 있는 자들이며 그로 인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자들이며 비겁하거나 고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다. 나는 이 작품의 부조리를 통해 우리 인간 자유의 중요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다른 행동을 통해 행동을 변화시키는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옥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이것을 깨트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것을 피하고 싶다면, 그냥 단순하게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행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렇듯 나의 정신은 나를 인식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인간의 삶을 반영하고 이를 숙고하게 하는 연극에 대해 고대는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다. 그 가운데 적극적으로 연극에 접근한 철학은 실존주의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주장으로 본질론을 뒤집었던 실존주의는 비사변적이고 인간의 구체적 행위가 담긴 실존적 모습을 성찰하였기 때문에, 숨 쉬는 신체가 현존하는 무대예술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될 정도로 문학에 재능을 보여 주었으며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도 명성을 드높였다.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카뮈 역시 자신의 철학을 문학과 연극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표현하려고 하였고 특히 관객의 반응을 통해 즉각적으로 피드백이 가능한 연극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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